언젠가부터 소지섭은 낯익지만 가깝게 느껴지진 않는 이름이 되었다. ‘소간지’라는 별명처럼 그는 어떤 뚜렷한 실체보다는 스타일리시한 이미지에 가까웠고, SBS <카인과 아벨>의 이초인이나 MBC <로드 넘버 원>의 이장우 같은 캐릭터는 오히려 스타 소지섭의 아우라에 눌리는 느낌이었다. SBS <발리에서 생긴 일>과 KBS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의 연기와 캐릭터를 통해 스타가 되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캐릭터로의 몰입을 막는 역설. 개봉을 앞둔 영화 <오직 그대만>이 작품의 만듦새와는 별개로 소지섭의 팬들에게 반가울 작품이라면, 소지섭이라는 배우의 희소한 매력과 어두운 과거를 지닌 복서 장철민의 캐릭터가 가장 높은 수준에서 결합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과연 그것은 소지섭 본인에게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배우에서 스타가 되었지만 여전히 배우이길 더 바라는 스타 소지섭과의 대화.
<#10LOGO#> 개봉을 앞둔 <오직 그대만>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는데 당시 일반 관객들과 기자들에게 호평을 얻었다. 시사회 반응도 좋고.
소지섭: 나도 그날 처음 봤는데 다행히도 보는 분들이 반응을 보여주시니 기분이 살짝 좋아지더라. 사실 감독님과도 얘기했지만 흥행은 하늘이 주는 거니까 우리가 어떡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마음속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면 좋겠다고 했었다. 아직까진 그런 거 같아 다행이다.
“참 묘한 거 같다, 연기란 건”
<#10LOGO#> 관객으로서의 본인이 볼 땐 어떻던가.
소지섭: 나는 객관성이 떨어지지. 보는 내내 울컥했다. 그동안 고생한 게 스쳐지나가니까. 육체적, 정신적 고통들이.
<#10LOGO#> 격투기 선수로 나오는 만큼 육체적 고통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신적 고통은 무엇이었나.
소지섭: 멜로 감성을 유지하는 게 굉장히 힘들더라. 이게 드라마와는 다르다. 드라마는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감정이 훅 지나가고 다시 다른 걸 연기하면 되는데, 영화는 한 컷을 찍은 다음 그 다음 컷을 준비하는데 길게는 서너 시간 걸린다. 그 전 컷에 맞춰 감정을 연기하려면 굉장히 집중해야 한다. 그러니 감정을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게 너무 힘들더라. 특히 나는 작품 끝난 뒤에 여운이 오래 가는 편인데 그나마 다른 작품을 찍고 있어서 그걸 덮을 수 있었다. 아니면 좀 힘들었을 거 같다.
<#10LOGO#> 그런 감정 유지에 있어 상대 배우와의 호흡은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소지섭: 한효주 씨의 경우 예전에 시상식 할 때 한 번 마주친 게 전부인 사이였다. 나는 밝고 명랑하고 통통 튀는 사람일 거라 짐작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반대더라. 진중하고 연기에 대한 고민도 많고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타입이다. 그게 도움이 많이 됐다. 진한 멜로를 해야 하는 현장에서 까불까불 하고 정신없이 굴었으면 감정 이입이 어려웠겠지. 그런데 정화라는 인물이 되려 고민을 많이 하는 걸 보며 나 역시 도움을 많이 받았다.
<#10LOGO#> 하지만 시각 장애인 역할을 하는 상대방과 연기하긴 어려울 것 같다.
소지섭: 배우는 상대방의 눈을 보고 감정을 전달하고 연기를 하는데 나를 안 보는 거다. 처음에는 굉장히 답답했다. 연기를 어떡해야 하나. 집중을 못하겠더라. 그러다 일주일이 지나니 그게 익숙해졌다. 이 사람, 정말 내가 안 보이는구나, 그런 느낌을 받으니까 나중에는 편해졌다. 참 묘한 거 같다, 연기란 건.
<#10LOGO#> 사실 영화가 그 절절한 멜로와는 별개로 스토리 자체가 참신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
소지섭: 이런 식의 사랑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영화를 보는 분들이 옛날 생각 하면서 첫사랑이나 짝사랑의 설렘 같은 걸 다시 끄집어낼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0LOGO#> 그런 감정을 전달하는데 있어 소지섭이라는 배우가 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던 건가.
소지섭: 그렇진 않다. 나는 ‘이걸 잘해, 이걸 보여줄 수 있어’ 이런 성격이 아니다. 나를 괴롭혀서 쥐어짜야 하는 스타일이다. 안 되는 연기는 정확히 알지만 잘 하는 연기가 뭔지 잘 모른다. 자신 있는 연기도 없고.
<#10LOGO#> 그럼에도 <오직 그대만>의 철민을 보면 ‘아, 소지섭은 이런 걸 참 잘하는 배우구나’ 싶다.
소지섭: 사람들이 그렇게 봐준다. 그렇게 각인이 된 거 같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성격은 무겁고. 그런 역할로 나왔던 영화나 드라마가 잘 되니까 그걸 기억하고 기대하고 보셔서 더 그런 거 같다.
“<발리에서 생긴 일>을 찍을 때 동일인물이 되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10LOGO#> 그게 한계로 작용할 수 있을까.
소지섭 : 극복해야지. 언제까지 거기 갇혀 있을 건 아니니까. 다른 캐릭터를 만나서 다른 걸 보여주려 노력해야한다. 다만 연기라는 게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있고, 말로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나이가 더 들면 몸을 안 쓰는 일이 많을 거라 생각해서 좀 더 많이 움직일 수 있고 건강할 때 이런 걸 많이 하고 싶다. 액션도 그렇고.
<#10LOGO#> 나이의 문제도 있지만 과거 <로드 넘버 원> 인터뷰 땐 양복 입고 멋 내는 역은 싫다고 했다.
소지섭: 한 것보단 해야 할 게 많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양복 입고 폼 잡고 이런 건 재미가 없다. 그냥 땅바닥에 앉고 바닥에 떨어진 것도 주워 먹는 그런 편안한 연기가 좋다. 부잣집 아들 같은 역할이면 행동에 제약이 생긴다.
<#10LOGO#> 재미라 했는데 연기를 할 때 재미를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소지섭: 배우로서 모든 사람들이 비슷할 거 같은데 동일인물이 됐다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어쨌든 나는 내 안에서 쥐어짜서 인물에 맞추는 스타일인데 어느 순간 내 행동이 아니라 그 인물의 행동이나 말투가 나올 때 소름 끼치는 느낌이 있다. 그럴 때 되게 짜릿하고 재밌다. 그런 재미를 <발리에서 생긴 일>을 찍으며 느꼈다. 그 전에는 잘 몰랐고.
<#10LOGO#> 결국 본인과 다른 인물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인데, 그런 생각도 든다. 과연 사람들이 소지섭에게 배 나온 루저 역할을 바랄까? 본인 역할에 대한 대중의 바람이라는 게 있다.
소지섭: 한계가 될 수 있겠지. 지금 시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돌아볼 때 사람들이 바라보는 소지섭만 있더라. 집에 혼자 가만히 있으면 내가 누구지? 난 뭐지? 사람들이 바라보는 소지섭에 맞춰가려 하고 이미 그렇게 하고 있고. 어느 순간 내가 없어지더라. 얼마 전까지도 굉장히 힘든 시기였다. 연기적인 슬럼프가 있었다.
<#10LOGO#> 연기적인 슬럼프라는 건 심리적 문제인 걸까.
소지섭: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쥐어짜고 끄집어내서 하는 스타일인데 15년 동안 끄집어내기만 하고 집어넣지를 않았다. 안이 비어있어서 현장 나가면 너무 힘들다. 휴식이 필요할 수 있는데 또 지금이 배우로서 좋은 나이라 많은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어떤 게 좋을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10LOGO#> 휴식을 하며 채워간다면, 혼자 있는 게 좋은가, 남과 소통하는 시간이 좋나.
소지섭: 혼자 있는 걸 절대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는 게 제일 좋다. 사실 전에는 사람 목소리 듣고 싶어서 TV 틀고 그러다 TV 소리도 싫어져서 벽 보고 말하던 시기도 있었는데 이제는 혼자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게 좋다. 생각을 지우려 노력한다.
<#10LOGO#> 스스로를 채우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오히려 비우는 것에 대해 말한다.
소지섭: 그게 채우는 거다. 뭘 넣으려고 애쓰면 또 스트레스고, 날 놓고 있으면 거기서 얻어지는 게 있다. 몇 달이고 일 년이고 오래 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보는 게 중요할 거 같다.
“설렘과 떨림이 없으면 이 일을 못할 거 같다”
<#10LOGO#> 혹 일탈도 좋아하나.
소지섭: 좋아한다. 남들이 생각하는 소지섭, 그 외의 행동들을 하려고 노력한다. 재밌는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도 그렇고 타투도 마찬가지고. 그에 따른 즐거움이 있지, 분명.
<#10LOGO#> 사진 찍는 취미도 있었는데.
소지섭: 좋아했는데 그게 일이 되니까 내려놨다. 좋아서 하는 건데 사람들이 바라는 게 많아지니까 부담스러워지더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건 확실히 구분됐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좋아하는 게 뭔지 얘기 잘 안할 거다. 말하는 순간 일이 되니까.
<#10LOGO#> 스톰 모델 소지섭과 지금의 스타 소지섭이 하는 말의 무게가 다른 거 아닐까.
소지섭: 감사한 일이지만 그에 따른 고통과 부담이 있다. 물론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이 일을 안 할 테지만.
<#10LOGO#> 일이라 했지만, 사실 한류 스타의 이미지는 언젠가부터 작품과는 별개로 존재하게 되더라.
소지섭: 한류 스타란 말 안 좋아한다. 배우 소지섭이 좋다.
<#10LOGO#> 그래서일까, 전에 비해 해외 작업 소식이 적다는 느낌이다.
소지섭: 일본이랑 중국 쪽과 작품을 비롯해 얘기되고 있는 것들이 있긴 한데, 우선은 한국에 주력하고 있다. 해외에 주력하면 한국에서의 일이 망가지고 작품 사이 간격도 길어지니까. 해외 일은 기회가 되면 하고 싶은 거지, 일본이나 중국 쪽의 사정에 맞춰 움직이고 싶진 않다.
<#10LOGO#> 하지만 한류 스타로서의 위상을 떠나 배우로서 글로벌 프로젝트의 재미가 있을 수도 있을 텐데. <소피의 연애 매뉴얼>에서 ‘워 아이 니’라 말하는 코믹한 장면처럼.
소지섭: 그쪽에서 일하는 게 재밌는 게, 한류 스타라고 해도 나를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작품 선택할 때 좀 더 재밌게 할 수 있다. 작품이 한국으로 넘어오면 욕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니 <게게게 노 키타로>에서 요괴 역할도 하고 <소피의 연애 매뉴얼>에서 망가질 수 있는 거다. 언어 장벽이 있긴 한데 무서워하지는 않는 거 같다.
<#10LOGO#> 배우로서 경험한 시간 덕분일 텐데, 그럼에도 아직 무서워하는 게 있나.
소지섭: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는 아직 떨린다. 그건 어쩔 수 없다. 평생 갈 거 같다. 기본적으로 그 설렘과 떨림이 없으면 이 일을 못할 거 같다. 너무 자신만만하고 카메라 앞에서 자유로워지면 어느 순간 장난이 될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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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위근우 기자 eight@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10 아시아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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