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⑧ 2년전 임직원들이 쓴 '현대차 스토리' 47話
[아시아경제 김혜원 기자]자동차 만들 시간도 모자란 현대자동차그룹 임직원들이 지난 2009년 갑자기 글을 쓰는 '작가'로 변신했다. 17개 그룹사가 참여한 '임직원이 쓰는 감동 스토리'라는 재밌는 프로젝트가 한창일 때다.
1, 2차 워크숍과 교정 및 편집 과정을 거쳐 지난해 발간된 책자에는 현대차그룹의 10년 역사 속에 담긴 임직원의 꿈과 희망, 위기 극복 의지와 열정 등을 소재로 47개 이야기가 담겼다. 내부적으로는 조직 가치를 공유하는 기회와 소속감을 강화하는 계기가, 대외적으로는 현대차그룹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창구가 됐다. 10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수많은 난관과 위기를 극복한 그들의 '입'을 빌어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을 재조명해본다.
◆와이프보다 더 힘들었던 YF 쏘나타 개발
"디자인, 성능, 가격에서 선두에 서야 한다. 이는 회사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
지난 2004년 10월8일. 기아차 경영 전략 회의에 참석한 정 회장은 경영진에 습관적인 쓴 소리를 내뱉었다. 모닝과 스포티지가 탄생한 해다. 이듬해에는 프라이드와 그랜드 카니발, 로체가 기아차 로고를 달고 등장한 즈음이다. "모든 면에서 선두가 돼라"는 정 회장의 질책은 현대ㆍ기아차 임직원들에게 자동으로 세뇌됐다.
'임직원이 쓰는 감동 스토리'의 첫 번째 책(에피소드1 : 만족)의 머리를 장식한 YF 쏘나타 개발 뒷이야기를 통해 정 회장의 자동차 개발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YF 개발을 주도한 상품전략총괄본부 팀원들은 "외부 환경 및 소비자 취향 변화, 그에 따른 경쟁사 개발 동향을 고려해 초기의 상품 기획안을 자주 변경했는데 향후 YF 성패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높은 상품성을 갖출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수차례 닥친 위기에서 정 회장의 빠른 결단은 큰 힘을 발휘했다는 후문이다.
첫 번째는 디자인. YF 디자인이 파격적일 수 있었던 것은 내부의 적잖은 반대에도 최고 경영층의 "그대로 추진하라"는 한마디로 가능했다. 국내 마케팅 부서에서 벨트 라인이 높아 측면 개방감과 시계성이 나쁘다며 디자인 변경을 요청했으나 경영진의 실차 시승 후 원안이 채택된 것이다.
두 번째는 엔진. 지난 2008년 6월12일 양재동 동관 13층 A 회의실에는 백전노장들이 머리를 맞댔다. 고유가로 인해 디젤 차량 수요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YF 디젤 개발을 백지화할 것인가 여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당시 YF의 디젤엔진은 내수 전용으로 연간 6000여대 물량이 계획돼 있던 터라 수익성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정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대형차와 수입차에 적용되는 고급 사양을 추가해 YF 이미지를 높이고 판매력 증대를 이끌어 내면 디젤엔진 탑재 취소에 따른 부진을 만회할 수 있다"는 현업 팀원들의 대안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북미 시장을 타깃으로 개발된 YF는 디젤에 이어 V6엔진마저 포기했다. 고유가 시대 연비 효율이 복병으로 떠오른 탓이다. 힘은 좋지만 연비가 나쁜 V6엔진 대신 GDi 신형 엔진을 넣기로 결정이 된 직후 정 회장은 "연비 효율형 2400cc GDi 엔진 개발 일정을 최대한 단축해 북미 시장 양산 시점에 탑재할 것"을 지시했다.
정 회장의 '쏘나타 사랑'은 널리 알려진 바다. 지난 2004년 11월11일 미국 앨라배마 공장을 방문한 그는 "내년 3월 '메이드 인 USA'로 본격 생산에 들어갈 쏘나타 신차는 현대차의 얼굴이자 자부심"이라며 "미국 고객과의 첫 만남이 최고의 품질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체계적인 품질 시스템을 갖추고 진정한 '월드 베스트 카'를 생산해 달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현대차에 쏘나타가 있다면 기아차에는 K 시리즈가 정 회장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기아차 K7을 출시하기에 앞서 'K'라는 통일된 네이밍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해 결실을 맺은 마케팅사업부 직원들은 "회사 최고 경영진이 시대의 흐름에 맞게 전략적이고 소비자 중심적 사고로 많이 바뀌는 것 같다. 예전 대기업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고 당시 느낌을 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K7이란 차명은 론칭 직후 실시한 만족도 조사에서 '82% 지지'의 압도적 수치를 이끌어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현장 리더십
현대자동차의 첫 해외 진출은 1976년 '포니' 6대를 에콰도르에 수출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으나 미국 시장에 진출한 1986년을 원년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현대기아차 임직원들은 책에서 "많은 우려와 리스크를 안고 현대차가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동력은 선진 시장 진출이라는 정 회장의 강력한 의지 덕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현대차의 오늘을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1986년 1월20일. 1055대의 엑셀을 실은 올리브에이스 호는 태평양을 향해 힘찬 기적을 울렸다. 엑셀은 미국 교포들에게 있어 단순한 소형차가 아니라 '달리는 태극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54개에 불과했던 현대차 딜러 수는 2년 뒤 278개로 급증했다.
하지만 엑셀 단일 차종으로 거둔 미국 진출 성공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품질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싸고 품질 좋은 차'가 아닌 '싼 게 전부인 최악의 차'로 인식이 급변했고 이미지는 악화일로에 놓였다. 1989년 한 해에만 2명의 미국법인(HMA) 사장이 물러났다. 당시 현대차에 대한 가장 큰 소비자 불만은 걸핏하면 여기저기 고장을 일으키는 내구성 부족과 엔진 출력이었다. 이 두 가지 사항은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1993년 새로이 HMA 사장이 된 더그 마짜는 판매 실적보다 고객 만족도와 품질 개선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 연일 반복되는 회의를 통해 얻은 결론은 '고장을 줄이기보다는 브랜드가 책임을 져주자'였다. 방법으로는 폭스바겐이 시도를 했다 철회했던 '10년 10만 마일' 보증제가 거론됐다.
회의적인 시각이 대세였지만 정 회장은 1998년 12월 마침내 10년 10만 마일 보증을 도입하기로 최종 결론지었다. 리스크를 동반한 벼랑 끝 전략이었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던 절박한 상황에 내린 용단이었다. 정 회장의 과감한 결단으로 HMA는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HMA의 미국 시장 판매량은 연간 약 40만대. 다음 목표치는 연간 70만대를 파는 닛산을 제치고 수입 브랜드 3위로 올라서는 일이다. 2009년 12월 HMA 주재원으로 근무한 S차장은 "판매는 우리의 목소리가 소비자들에게 충분히 공감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올 겁니다. 판매를 늘려 보겠다고 우리끼리 공감되지도 않는 얘기를 아무리 해봐야 들어주는 소비자는 없다는 것. 이것 역시 그동안의 HMA 시장 공략 역사를 통해 깨우친 귀중한 가르침이죠"라며 목표 달성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베이징에서는 '현대 속도'라는 신조어가 중국인 입에 오르내린다. 현대차의 추진력과 발전 속도를 설명하는 대명사로 통한다. 현대기아차 생산개발총괄본부에서는 "중국 시장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판매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연 5만대의 생산 능력으로 시작한 현대기아차 중국 공장 생산 체계는 7년여 만에 20배 증가한 연 100만대가 됐고 이것도 모자라 또 다시 증량을 위한 밑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책에 적었다.
특별취재팀(이정일ㆍ채명석ㆍ최일권ㆍ김혜원ㆍ조슬기나 기자) kim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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