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호세 캄파넬라라는 감독이 만든 '엘 시크레토'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는 사랑하는 신혼의 아내를 죽인 살인범에게 복수하는 남편이 등장한다. 그 남편은 법이 처벌하지 못했던 살인범에 대한 가장 처절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 방식은 살인범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허망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한때 그 살인범을 잡고자 했던 인물이 25년 만에 극적으로 살인범과 조우한다. 바로 그 남편이 만들어 놓은 개인 감옥에서 살인범이 25년 만에 최초로 건넨 말은 '살려달라'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달라"는 것이었다.
그 남편이 택한 처절한 복수의 방식, 허망한 삶의 방식이란 바로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음으로써 타인과의 소통을 완벽하게 차단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자유를 구속당하는 것보다 타인과의 소통을 차단당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사회 이곳저곳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는 존재이다. 소통을 통해 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존재를 인식하고 나아가 자신의 삶을 실현해 나간다. 인간에게 소통은 곧 삶이다.
그래서일까. 소통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미디어시대를 맞이해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특히 트위터ㆍ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가히 무한 소통에 가까울 만큼 확장되고 있다.
얼마 전 국제교육협의회(IEA)가 발표한 국제 시민의식 연구에서 우리 청소년들의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비교 대상 36개국 중 35위라는 실태를 접했다. 우리 청소년들의 시민의식 관련 지식에 대한 이해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대하는 태도 등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능력은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나타났다.
또 여성가족부가 가족 소통 실태를 청소년 중심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버지와의 대화가 부족하고, 이에 비해 어머니와는 상대적으로 대화를 하지만 어머니가 자신을 더 이해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소통이 넘쳐나는 시대에 이런 실태를 접하는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미디어를 통해 이뤄지는 무한소통의 시대에 소통 부족, 소통 능력 부재라니….
하지만 이는 그동안 우리가 소통을 확장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지, 진정한 의미의 대화에 대해 성찰하지 못한 결과이다. 소통을 통해 이뤄지는 대화의 질적인 측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우울증의 사회적 증가, 청소년 자살률과 성인 자살률이 모두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을 향해 치닫고 있는 현상 이면에는 무한 소통 속의 고독, 대화 부족이라는 현상 또한 잠재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진정한 대화는 우선 상대방의 이야기를 존중하면서 내 이야기를 하는 것,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공유와 소통이 이뤄지는 것을 중시하는 언어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 해결의 출발이다. 치열해지는 경쟁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사회일수록 더욱 절실하게 진정한 대화가 필요하다.
소통하지 않는 삶은 허망하다. 이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허망함은 인간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소통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 허망함에 대한 대안은 진정한 대화일 것이다. 이제 진정한 대화의 방식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공감과 배려를 통해 이뤄지는 대화에 대한 교육 말이다.
최미숙 상명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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