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에서 대학의 시작은 배움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기숙사와 교사 등 건물을 마련하고 명망 있는 학자를 초빙하여 학문을 수련하였다 하니 요새처럼 교수와 건물을 준비한 후 학생을 모집하는 방식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이러한 기원을 갖는 서구의 오랜 대학들은 딱히 캠퍼스라고 할 만한 곳이 없는 경우도 꽤나 많다.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건물의 합이 대학이 되고, 대학과 주민들이 사는 동네가 엉켜 있는 곳도 많다. 대학과 동네의 경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대학 하면 수십만평의 담장 쳐진 캠퍼스에 들어앉은 거대한 건물군을 떠올린다. 묵직하고 중후한 건물일수록 대학 건물답다고 친다. 대학의 홍보 사진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도 그 대학에서 제일 크거나 비싼 건물인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2007년 회계 기준으로 전체 교육비 중에서 '자본적 경비' 비율 명목으로 17.4%를 지출했는 데,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의 약 2배에 가깝다고 한다. 자본적 경비의 대부분은 건물 신축비와 토지 취득비 같은 부동산 관련 비용이다. 역사가 오랜 서구의 대학들은 기본적인 교육 인프라를 갖춘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시설 투자에 소극적이나 우리 대학들은 등록금의 상당 부분을 시설 확충에 쏟아붓고 있으니 이는 분명 과한 일이다.
현실을 보자. 대학 내 시설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강의실과 같은 교육공간은 1년에 4개월여는 방학으로 거의 사용하지 않고, 이른 아침이나 저녁 혹은 금요일 오후 등 학생들이 기피하는 수업시간 대에는 사용률이 저하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강의실 활용률은 60%를 밑돌고 있다. 잘만 운용된다면 지금보다 거의 절반의 공간을 갖고도 모든 강의를 충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교내 식당, 체육관, 서점 등은 방학 때 거의 폐업 상태가 되곤 하는 곳이 많다. 따라서 무분별한 시설 확충을 통해 비싼 재원을 낭비하기보다는 효율적인 시설활용책을 먼저 강구하는 것이 맞다.
물론 대학시설 중에는 시급히 확충되어야 할 것도 있다. 기숙사가 그것이다. 서구 유수대학의 기숙사 수용률은 대개 50%를 훌쩍 넘는다. 90% 이상을 채운 곳도 많다. 우리의 경우 20% 넘기는 곳을 찾기 어렵다.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 51개 대학(전문대 포함) 재학생 27만명 중 절반 이상인 14만명이 지방에서 온 학생이라고 한다. 하지만 서울지역 대학 기숙사 수용인원은 1만7500명(12%)에 불과하다. 나머지 학생 중 상당수는 월 40만~50만원에 이르는 방값을 내며 공부해야 한다. 대학에서 해야 하는 공부의 양은 갈수록 많아지므로 요새는 서울에 집이 있는 학생도 기숙사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학에서 기숙사 입사 경쟁률은 대학 입시 경쟁률을 웃돈다.
서구의 대학을 다시 보자. 대학 기숙사나 교육 연구공간이 꼭 대학 담장 내에 있을 필요는 없다. 거대한 건물일 필요도 없다. 이미 우리보다 먼저 공간 부족을 겪었던 서구의 많은 도심형 캠퍼스들은 인근 동네를 활용해 왔다.
동네 주택을 빌리거나 구입하여 학생 기숙사로 활용하고, 동네 적당한 건물에 세들어 연구를 한다. 이렇게 대학이 동네로 들어오고 동네와 대학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주민도 좋다. 대학의 분위기와 시설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은 시설투자비를 절약할 수 있으므로 이득이다.
많은 대학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담장 속 시설 확충에 힘쓰고 있다. 불필요한 낭비다.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우선 캠퍼스 내의 시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그래도 시설이 부족하면 밖으로 나와 동네 공간을 활용할 때다.
김세용 고려대 건축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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