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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회장님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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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회장님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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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메시지다.' 미디어 소통의 이론을 뒤집은 마샬 맥루한의 말이다. 같은 메시지라도 미디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무게와 색깔이 달라진다는 얘기다.


맥루한의 말투를 흉내내면 '그가 곧 메시지'로 통하는 한국적 현상이 있다. 그의 말은 절제돼 있다. 짧은 한마디 말을 들으려 기자들이 몰린다. 그의 말은 곧 뉴스이자 이슈다.

'대전'을 말하면 그것은 지명을 넘어 뜨거운 정치적 언어가 된다. '위기'는 현상의 진단이 아니라 10년 후 비전의 다른 말이다. 한국에서 스스로 메시지가 되는 사람은 둘 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다.


지난주 이 회장이 던진 '분노'의 메시지가 세간의 화제다. 이 회장은 사장단회의에서 삼성테크윈 감사 결과에 대로했고 이를 삼성에서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삼성 측이 밝혔듯 삼성테크윈의 비리가 '사람 사는 데 있을 수 있는 정도'라면 조용히 처리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자청해서 치부를 밖에 알렸다. 이 회장의 뜻이라는 얘기다. 그럼 그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을까.

드러난 경과는 단순하다. 삼성테크윈 감사에서 다수의 비리가 적발됐다. 이 회장은 삼성의 자랑인 깨끗한 조직문화가 훼손됐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부정부패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질타했고 이를 언론에 공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금 넓혀보면 바깥의 시끄러운 확성기를 동원해 공개 경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조용히 기강을 잡으려면 발동이 늦게 걸린다. 그러나 이 회장의 입에 쏠리는 미디어의 생리를 이용하면 단숨에 조직 말단까지 장악할 수 있다. 삼성이 비리의 존재를 공개하면서도 내용을 함구한 것은 이 같은 노림수가 있다는 방증이 될 법하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이 회장의 메시지는 부정부패 척결 의지, 그것이 전부일까. 그가 던진 메시지에는 늘 숨어 있는 뜻이 더 깊었다. 1993년 '다 바꾸자' 할 때도, 지난해 '위기론'을 들고 나올 때도 그랬다. 이번에도 다중적 포석의 흔적이 발견된다. "해외에서 잘나가던 회사들도 조직의 나태와 부정으로 주저앉은 사례가 적지 않다"는 지적과 "삼성도 예외가 아니다"라는 대구에서 이 회장의 속내가 엿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회장은 사장단회의 다음 날 "그룹 전반에 부정부패가 퍼져 있다"고 발언의 강도를 높였다. 그것도 출근길에 기자들에게 다가가 '질문 없느냐'고 청했다니 종전의 모습과는 영 다르다. 준비한 메시지라는 얘기다. 부정부패는 그룹 차원으로 확장됐고 삼성테크윈은 희석됐다. 삼성그룹이 부패했다니, 심각한 문제다. 하지만 그것은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재계 전반의 문제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삼성이 그 정도라면 다른 곳은?"


'잘나가던 해외 기업의 몰락'과 '부정과 나태', '그룹 전반의 부정부패'를 묶어내는 단어는 '위기감'이다. 외부의 도전, 세간의 비판적 시각.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잘나가는 대기업의 나태함 내지는 부정부패.


세계 모바일폰을 장악했던 노키아는 매출 전망도 내지 못할 처지가 됐다. 일본의 자존심 소니와 도요타도 휘청거린다. 삼성 역시 애플 공세에 혼쭐이 났다. 글로벌 시장은 '졸면 죽는' 존망의 각축전이 한창이다.


나라 안은 어떤가. 양극화, 동반성장, 소모성자재 구매대행(MRO)에 초과이익공유제 논란까지 가세해 대기업을 압박한다. 정치의 계절도 다가온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대기업을 옥죄겠다는 목소리는 커질 것이 분명하다.


이 회장은 조직의 긴장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부패 사정'을 앞세워 삼성 내부와 재계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은 아닐까. 재계를 향한 거대한 쓰나미의 기운을 경고하는.




박명훈 주필 pmhoo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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