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10주기···정주영을 다시 만나다
갈라선 형제들 추모전서 한자리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여러 명의 자식 가운데 잘난 녀석도 있고, 못난 녀석도 있어. 내 유전자의 나쁜 면을 좀 많이 가진 녀석도 있고, 내 좋은 점만 가진 녀석은 똑똑하고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어느 녀석도 잘났든 못났든 내 책임 아니겠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살아 있을 당시, 장우주 전 현대종합상사 사장을 부르더니 던진 말이란다.
어머니 한성실 여사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고 성장한 정 회장은 사업으로 바쁜 나날을 지내는 가운데에서도 8남 1녀의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고 한다. 다만 여느 아버지들처럼 공식석상에서 이를 드러내지 않았고 회사에 들어온 아들이 좋은 실적을 내도 직원들 앞에서 칭찬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은 정 회장의 경영 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북한을 방문해 현지에 남은 친척들을 만나고, 소때를 몰고 방북을 하고 대북사업을 추진한 것도 결국 온 가족이 모두 함께 잘 살고 싶다는 소망에서 비롯됐다.
이런 그의 소망은 별세 직전 그룹의 유동성 위기와 후계 구도를 둘러싼 형제들간의 갈등으로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룹이 갈리고 현대그룹 성장의 모태였던 계동 현대 사옥에 자식들이 하나둘 빠져 나가자 유명을 달리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고 범 현대가는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지난해 하나 둘 다시 뭉치고 있다. 6남 정몽준 의원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은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오일뱅크를 되찾았고, 올해 장남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현대의 모태였던 현대건설을 되찾았다. 이어 정몽구 회장은 10년여만에 계동 사옥에 집무실을 마련해 조만간 새로 맞이한 현대건설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의 막내 동생이자 형을 가장 닮고 싶어했다는 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과 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도 범 현대가를 다시 뭉치는 데 힘을 실어줬다.
마침내 지난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정 회장 10주기 추모 사진전에 자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참석해 시아주버니인 정몽구 회장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누구도 할 수 없었던 형제간 갈등의 골을 풀어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버지 정 회장이었다.
이날은 마침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가 열렸다. 새로 취임한 허창수 회장의 첫 공식 일정이자, 4년여 만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모습을 보였다. 김황식 국무총리와 재계 총수간 인사를 겸한 이 자리에서 정몽구 회장은 만찬 호스트로 재계의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이를 바라본 재계 관계자는 생전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 회장이 가족 뿐만 아니라 재계를 한 자리에 모은 아버지의 역할을 한 셈이다.
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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