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전성호 기자]제15회 아시안컵이 8일(이하 한국시간) 개최국 카타르와 우즈베키스탄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23일간의 열전에 돌입한다.
대륙별 국가대항전인 아시안컵은 축구 변방이었던 아시아 국가간 경쟁을 통해 축구 발전을 이루고, 세계무대에서도 탈아시아를 외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해줬다.
한국 역시 1956년 제1회 홍콩 아시안컵과 1960년 제2회 한국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아시아 축구의 맹주로 자리 잡았다.
이후 비록 51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아시아 정상을 밟아보지 못했지만, 한국은 아시안컵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숱한 명승부를 연출해냈다. 이들 명승부에는 한국 축구 발전사 속 환희와 애환과, 심지어는 정치사회적 배경까지도 모두 녹아있다.
① 1956년 제1회 홍콩 대회 - 한국 vs 홍콩
제1회 아시안컵은 동부, 중부, 서부 지역으로 나뉘어 예선이 치러졌다. 개최국 홍콩을 비롯해 각 지역 대표가 4개국 풀리그로 우승팀을 가렸다.
중부지역 최종예선에 참가한 한국은 첫 상대 필리핀을 꺾었다. 이제 대만과의 예선 2차전만 승리하면 아시안컵에 진출하는 상황.
그러나 돈이 문제였다. 명색이 국가대표였지만, 한국전쟁 후 축구협회의 재정이 어려웠던 시절이라 한국 대표팀은 항공료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KNA(현재 KAL)에 배려를 요청, 대만까지 외상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만약 대만에 지면 그대로 귀국하고, 승리해 아시안컵 진출권을 따내면 대만에서 친선경기를 한번 더 치러 그 경기의 수입으로 홍콩행 항공권을 구입하겠다는 복안이었다.
한국은 대만을 꺾고 아시안컵 진출권을 따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갑작스런 폭우로 친선경기가 취소됐다. 결국 KNA에 다시 한번 사정해 홍콩으로 또 다시 외상 비행기를 탔다. 선수단은 경기 시작 7시간 전인 오후 2시에 홍콩 현지에 도착했다. 빡빡한 항공 스케줄 탓에 뜬 눈으로 밤을 샌 선수단은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아침 겸 점심식사를 마치고 곧장 경기장으로 향했다.
9월이지만 홍콩의 날씨는 무더웠다. 첫 경기 상대는 개최국 홍콩. 선수들은 피로와 더위라는 이중고를 겪어야만 했다. 전반에만 두 골을 내주며 벼랑 끝에 몰렸다. 체력도 투지도 바닥이 나 있었다.
그 순간 더위를 식히는 소나기가 내렸다. 하늘이 도운 셈이었다. 날씨가 선선해지자 기력을 되찾은 한국은 후반전에 두 골을 만회하며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패배를 면한 한국은 이후 이스라엘과 베트남에 2연승을 거두며 아시아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참고로 일본은 당시 멜버른올림픽 예선에 집중하기 위해 아시안컵 진출을 포기했다. 그 덕분이었을까. 일본은 한국과의 올림픽 최종예선에서 1승 1패, 골득실도 동률을 이뤘지만 추첨으로 올림픽 진출권을 따내는 행운을 얻었냈었다.
② 1980년 제7회 쿠웨이트 대회 - 한국 vs 북한
한국은 아시안컵 직전에 열린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껏 사기가 올라 있었다. 한국은 아시안컵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말레이시아와 비겼으나 공격수 최순호와 플레이메이커 조광래-이영무의 활약 속에 카타르(2-0), 쿠웨이트(3-0), UAE(4-1)를 차례로 격파하고 준결승에 올랐다.
준결승 상대는 바로 북한이었다. 지금도 남북 대결에는 많은 관심이 쏠리지만 당시는 남북 대립이 극에 달하던 군사정권 시절이었다. 북한은 일본만큼이나 절대로 패해서는 안 될 상대였다.
흡사 전쟁과도 같은 경기였다. 한국은 전반 18분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을 허용했다. 최순호는 북한의 철벽수비에 꽁꽁 묶었고, 북한 수비수와 골키퍼는 백패스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끌었다. 북한의 거친 몸싸움에 한국 선수들이 수차례 걷어차이기도 했다. 관중석은 고함과 야유로 가득 찼다.
후반 들어서도 한국은 파상공세를 펼쳤지만 북한의 골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패색이 짙어지던 후반 34분, 드디어 동점골이 터졌다. 골라인 아웃 직전 왼쪽 측면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정해원이 헤딩골로 연결한 것.
그러나 북한도 물러서지 않았다. 역습에 나선 북한은 골키퍼 1 대 1 기회를 잡았다. 다행히 조병득 골키퍼가 간신히 공을 쳐내 위기 상황을 넘겼다. 극도의 긴장감이 경기장을 휘감았다.
그 순간 한국의 기적같은 역전골이 터졌다. 동점골을 넣었던 정해원이 후반 42분 이영무의 패스를 받아 대포알 같은 왼발 슈팅으로 연속골을 터뜨렸고 한국은 2-1 역전승을 거둬 결승에 진출했다. 남한 전체가 승리에 열광했다.
한국은 결승전에서 쿠웨이트와 다시 만났다. 난적 북한을 꺾어 사기가 오른데다 조별리그에서 이미 3-0으로 이겼던 상대라 손쉬운 승부가 예상됐다. 그러나 북한전에서 힘을 너무 뺀 탓이었을까. 한국은 쿠웨이트에 0-3으로 대패해 아쉬운 준우승에 머물렀다.
비록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준결승에서 북한을 꺾은 한국 선수단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들이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공항부터 성대한 카퍼레이드 행사가 열릴 정도였다.
③ 2000년 제12회 레바논 대회 - 한국 vs 이란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중국과 1-1 무승부를 기록한 한국은 2차전에서 인도네시아를 3-0으로 눌렀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쿠웨이트에 0-1로 패하며 조 3위를 차지, 와일드카드로 간신히 8강 토너먼트에 올랐다.
8강 상대는 이란. 지금도 그렇지만 이란은 당시 한국의 아시안컵 최대 라이벌이었다. 특히 1996년 UAE 대회 8강전에서 한국에 2-6 대패의 수모를 안기는 등 아시안컵에서 '중동 징크스'를 만든 장본인이었다.
전반을 득점 없이 보낸 한국은 후반 26분 카림 바게리에게 40m 중거리 슈팅을 허용했다. 4년 전 악몽이 떠오르기 충분한 순간이었다. 이대로 또 다시 무너지는가 싶던 후반 45분, 기적이 일어났다. 김상식의 극적인 만회골이 터진 것. 기세가 오른 한국은 연장전에서 이동국이 역전 결승골까지 터뜨려 승리, 4년 전 패배를 깨끗이 설욕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명승부의 끝이 반드시 해피 엔딩은 아니었다. 한국은 4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1-2로 패하며 3위에 그쳤다. 결국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허정무 당시 대표팀 감독은 경질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게 됐다.
스포츠투데이 전성호 기자 spree8@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