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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전문경영인 영입…'자본·경영 분리'시대 개막

재계 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DNA서 찾는다 <5>두산그룹 박두병 회장③
정수창 회장 일찌감치 후계자 낙점 경영수업
1969년 동양맥주 사장 맡기고 경영일선 은퇴
73년 회장으로 승진 두산 '제2의 중흥' 이끌어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1945년 10월 13일, 작달막한 키에 패기만만한 26세의 한 청년이 소화기린맥주(동양맥주, 현 OB맥주의 전신) 평사원으로 첫 출근했다. 경리과로 배속된 정수창이라는 사람이었다.

연강 박두병 회장은 광복후 적산기업이 된 소화기린맥주 관리지배인으로 취임했는데, 경성고상 은사인 이인기 교수에게 '쓸만한 젊은이'를 추천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인기 교수는 박두병 회장의 경성고상 9년 후배이기도 했던 정수창을 추천했다.


정수창은 최인철, 윤현주, 명주현 등과 함께 박두병 회장과 고락을 같이한 전문 경영인중 한명이다. 향후 두산그룹 회장의 자리에 오르며, 국내 재계 역사상 첫 '전문경영인 시대'를 연 인물이기도 하다.

경성고상을 마친 후 중국 만주에서 흥업은행 은행원을 지내던 그는 어릴적부터 특기가 영어였다. 미군정 관리 아래에 있던 소화기린맥주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였고, 미군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영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입사 후 정수창은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미군정측과 민간측이 공존하던 2원 체제의 경영구조 아래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업무 추진력까지 겸비한 그를 박두병 회장은 일찌감치 자신의 후계자라 여기고 경영자 수업을 시켰다. 기대에 부응하듯 입사 7년만에 동양맥주 상무에 오른 정수창은 6.25 전쟁후 폐허가 된 동양맥주를 정상화시키는 한편 양조기술 자립, 맥주의 원료인 맥아공장 가동,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인 '마주앙' 탄생 등 수많은 일을 박두병 회장과 함께 해냈다.


하지만 전무로 승진 후 2년만인 1965년 정수창 전무는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삼성그룹 계열인 새한제지로 자리를 옮겼다. 박두병 회장이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후일 개인적인 서운함이 아니라 보수적인 경영을 하는 박두병 회장 밑에서는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성장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1967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된 박두병 회장은 공직에 전념하기 위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결심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그동안 꿈꿔왔던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직접 실천에 옮겼다.


1968년 박두병 회장은 "회사 창설 때부터 이 생각을 해왔으며, 이제 그 실천의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면서 "자기가 사장이라고 반드시 아들이나 동생이 사장을 계승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박두병 회장이 선택한 후계자가 바로 정수창이었다. 삼성물산 사장을 끝으로 4년간의 외도를 마친 그를 박두병 회장은 다시 돌아오라고 요청했다. 정수창 사장은 정중히 사양했으나 박두병 회장은 "나는 이제 상의 직무에 충실할 생각이며, 상의 일이 잘되면 한국 전체 상공인이 잘 되는 것이니 전체 상공인을 돕는 의미에서 도와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1969년 12월15일 정수창 회장은 동양맥주 사장에 취임하고 박두병 회장은 회장으로 직함을 바꿔 경영일선에 물러났다. 앞서 박두병 회장은 삼성그룹 총수 이병철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정수창 사장이 복귀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나중에 이병철 회장은 "벌써 그만두고 나간 사람을 쓰는 데에도 이렇게 양해를 구할 만큼 박두병이란 사람은 아주 훌륭한 예의를 지니고 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73년 폐암을 얻은 박두병 회장은 그룹 회장에 정수창 사장을 앉혔다. 이는 자신의 사후 그룹은 정수창 회장이 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20여년 동안 박두병 회장과 함께 그룹을 키워온 그만이 회장의 적임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특히 박두병 회장은 "내가 다음 회장을 자네를 세우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자네 다음 사장은 자네가 결정할 일이지 내 의사를 쓸데없이 촌탁해서 결정해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박두병 회장 사후 정수창 회장은 10년여간 자리를 지키며 두산그룹의 제2의 증흥기를 이끈 후 1981년 박두병 회장의 장자인 박용곤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하지만 1991년 페놀유출 사건이라는 사상 최대의 위기 상황이 벌어지자 정 회장은 다시 그룹 총수로 복귀해 상황을 안정화시키며 원로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박두병 회장의 믿음과 신뢰, 정수창 회장의 헌신이 합쳐져 한국 재계도 전문경영인 시대가 열렸다. 현재의 두산그룹은 오너경영 및 지주사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뛰어난 능력의 인재를 지속적으로 영입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경영에 관한 권한을 대폭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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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기자 oricm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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