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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과거로의 시간여행

시계아이콘읽는 시간2분 8초

[권대우 아시아경제신문 회장] 지난 주말 찾았던 강릉. 그곳에서 깊어가는 가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짙어진 단풍의 색깔이 그랬고,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모여든 나들이 행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나 대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잘 난 사람도 그렇고, 하루 세끼 먹고 살기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도 장엄한 계절의 변화를 보면 시름을 잊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대자연의 위력 앞에서 왜소해질 수밖에 없는가 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단풍으로 물든 절경속에서 스스로 겸손해지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값비싼 보약 먹는 것 못지않게 스스로를 살찌우게 하는 계기가 되지않았나 싶습니다.


행복한 모습은 불행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죽음의 모습은 병든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말도 있습니다. 오색 단풍의 향연속에서 불행한 사람의 눈, 병든 사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기(氣)를 듬뿍 받았으니 남은 2009년 마무리, 새로 맞이할 2010년 준비는 더욱 알차게 할수 있지 않을까하는 자심감을 가져 보기도 합니다.


강릉에 머무르는 동안 잠시 짬을 내 오죽헌에 들렀습니다.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선생이 태어난 유서깊은 곳입니다. 신사임당은 낡은 시대의 풍조에 얽매이지 않고, 여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은 분이었습니다. 일곱살 때부터 화가 안견의 화풍을 이어받아 산수, 포도, 곤충 등을 그리는데 뛰어난 솜씨를 보였습니다. 그림속의 풀벌레를 진짜 벌레인줄 착각하게 할 만큼 그림솜씨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표(師表)가 된 신사임당에 못지않게 율곡 이이선생은 경세가(經濟家)이자 정치인입니다. 모자(母子)가 동시에 5000원권과 5만원권에 등장할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지 않습니까?


오죽헌에서는 율곡제 준비로 부산했습니다. 취타대와 농악대를 앞세운 율곡선생 장원급제 삼일 유가행렬 리허설은 인상깊은 볼거리였습니다. 유치원생과 학생 250명이 동원됐다던가요. 이 행사는 25일부터 이틀동안 우리나라 유교 전통 제례(祭禮) 행사로 치러졌습니다.


이 행사는 고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1962년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는 율곡 선생과 충무공 이순신의 업적을 남다르게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그가 30년 전 율곡제 행사가 진행되는 기간에 서거했으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요.

서울로 돌아오는 차에 몸을 싣고 율곡 선생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가 떠난 지 425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의 생애와 업적이 회자되는 특별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곡 이이 선생. 그는 1584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조정에서 4조판서와 찬성을 역임했습니다. 향리에서는 후학의 육성으로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생각한 분이지요.


그가 당시 주장했던 10만 양병설 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당시 나라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면서 10만명의 병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때가 45세였습니다. 왕인 선조에게 장차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禍)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양성할 경우 엄청난 군비로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반대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0년 전에 사망했습니다. 죽기 전 유서를 남겼습니다.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 뜯어보라는 유서의 내용은 “모월 모시 밤에 임진강변의 화석정에 가서 불을 질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 10년 뒤 임진왜란이 벌어졌고, 그의 예언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인재(人災)라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여기저기서 포착됐고 이에 대한 경고가 있었는데도 대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조선은 이같은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탓에 왜군에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당시 율곡 선생의 말에 귀를 막은 조정의 이런 모습을 비꼬는 강릉사투리 버전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율곡선생이 10만 양병론을 주장했지만 강릉사투리로 하는 바람에 화를 당했다는 것이지요. 왕이 강릉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한 탓에 일본에 당하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이 버전은 인터넷을 도배할 정도로 전국 네티즌의 인기를 끌어 모았습니다. 그 이유는 독특하고 순박한 강릉사투리의 감칠맛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율곡 선생의 뛰어난 예견력, 급박하게 돌아가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같은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요란하던 재보선이 막을 내렸습니다. 여야의 운명이 갈렸습니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표심은 냉정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겼다고 영원히 이긴 것은 아닙니다. 졌다고 해서 영원히 진 것도 아닙니다. 정국의 향방, 국가의 미래는 시대의 낡은 틀을 누가 먼저 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재보선 결과에 국민의 어떤 뜻이 달려있는지, 예견력이 있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때입니다. 승자도, 패자도, 한계를 뛰어넘는 신사임당 정신,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율곡정신에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면 길이 열리게 돼 있습니다.

운명은 타고 나기보다는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을 겪은 30년 후 다시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을 떠올리면 지금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5000원 권과 5만원권에 새겨진 두 모자(母子)를 다시한번 들여다보며 425년 전으로의 시간여행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권대우 아시아경제신문 회장 preside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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