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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불고기 백반 1인분, 우동 한 그릇

시계아이콘01분 47초 소요

남루한 양복을 입은 시골의 노신사가 어린 아들과 함께 식당에 들어섭니다. 서울에서 사는 분 같지는 않습니다. 농촌에서 갓 상경한 농부임이 분명합니다. 말씨도 그렇고 그을린 얼굴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는 불고기 백반 1인분을 주문합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합니다.
“난 배가 불러서 먹기 싫다. 너 혼자 먹어라.”
음식이 상 위에 차려지자 아들은 정신없이 밥 한그릇과 접시 위에 놓여진 불고기를 다 먹어치웁니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의 아버지는 매우 흡족한 표정입니다. 아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기 때문일까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의 아버지는 불고기 백반 1인분 값을 아끼기 위해 자신의 몫은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1967년. 어느 날 저의 모습을 이렇게 재구성해 봤습니다. 그때 저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농촌에서 농사일을 돕지 않고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선택된 소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농촌의 경제사정이 하루 밥 세끼 먹는 것도 힘들었으니 당연히 축복이라 할 수 있지요.
그 해 어느 날 부친이 상경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막내아들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녁 때가 됐습니다. 부친의 손을 잡고 광림동(중구) 골목의 조그마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부친이 주문한 메뉴는 불고기 백반 1인분이었습니다. 본인은 굶더라도 아들에게만은 불고기를 먹이고 싶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힘이 솟았고, 두고두고 에너지가 됐습니다.
그때의 음식 값을 찾아 봤습니다. 설렁탕 70원, 커피 30원이었습니다. 반면에 불고기 백반 1인분 값은 150원이었습니다. 서민들이 선뜻 주문하기 힘든 불고기 백반을 주문한 부친으로서는 큰 돈이었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저의 밑천은 바로 부친의 그런 열정, 사랑, 배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억은 아름답습니다. 남들에게 말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그 추억이 만들어지는 길목에 서 있을 때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일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했던 과거에 대한 추억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추억은 더욱더 소중하지 않을까요?
한 지인(知人)에게 불고기백반 1인분 얘기를 꺼내봤습니다. 당시로서는 저에게만 있었던 추억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고리타분한 얘기고 특히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얼른 이해되지 않은 것이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을 수 있었고,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압축성장도 동력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지난 60~ 70년대에 흔히 있을 수 있었던 이런 일들 때문에 “한번 해보자. 나도 할 수 있다”는 도전정신을 키우는 에너지가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오늘 아침 불고기 1인분을 생각하게 된 것은 우동 한그릇 때문입니다. ‘우동 한그릇’이라는 단편소설(일본 북해도 출신 구리 료헤이가 썼음)이 42년 전 불고기 1인분을 떠올리게 한 것입니다. 이 원작을 바탕으로 한 연극이 제작돼 현재 국내에서도 공연되고 있습니다.
일본 삿포로에서는 이상한 풍습이 있습니다. ‘해 넘기기 우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2월31일 온가족이 둘러앉아 우동을 먹으며 한해를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우동을 먹은 후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첫 참배를 하는 관례인 셈입니다. 우리가 설날에 떡국을 먹듯이 그들은 섣달 그믐날 우동을 함께 먹는 모양입니다.
이같은 해 넘기기 풍습과 가난한 세 모자. 푸근한 인정의 소유자인 식당 주인의 배려모습,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게 된 두 형제와 어머니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우동 집을 배경으로 쓴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선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또 요즘은 장기간의 공연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관람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혼돈 속에 빠져 있지만 사랑, 존중, 배려가 그만큼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겠죠?
셋이서 우동 한그릇을 주문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도 돈이 없어서 우동 한그릇을 셋이서 함께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우동 한 그릇’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북해정이라는 작은 우동 집. 이집은 해마다 12월 마지막 날이면 손님들로 붐볐습니다. 눈발이 날리는 섣달그믐 밤.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낡은 옷을 입은 어머니가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이 우동 집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 우동 한 그릇을 주문합니다. 세 그릇을 시킬 돈이 없어 한그릇만 시킨 것입니다.
짜증을 낼 만한데도 북해정 주인부부는 밝은 목소리로 주문을 받고, 몰래 면도 더 얹어 줍니다. 이들의 딱한 사정을 눈치 챈 주인이 한 덩어리를 더 삶아 세 모자가 먹을 수 있도록 해준 것입니다. 다음해 섣달그믐날도 마찬가지입니다.
3년째 되는 해 우동 집 부부는 메뉴판 가격까지 일부러 낮춰 놓고 세 모자를 기다립니다. 예상대로 우동집을 찾은 세 모자는 우동 두그릇을 시키고 그간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교통사고로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서로 열심히 노력해 이제 그 빚을 갚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주인부부는 혹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걱정을 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매년 마지막 날에는 그 자리를 비워두기까지 합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은 다시 우동 집에 나타납니다.
두 아들은 장성한 청년, 어머니는 말쑥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큰아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14년 전 그믐날 밤, 세명이서 우동 한그릇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 때의 배려에 용기를 얻어 세사람이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의사가 됐고, 동생은 은행에 다닙니다.” 그리고 이들은 3인분의 우동을 주문했습니다.
세 모자의 밑천 역시 우동 한그릇이었습니다. 면 한덩어리를 더 삶아 세 식구가 다 먹게 하면서도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한 우동 집 주인의 세심한 배려 또한 그들에게는 두고 두고 인생의 밑천이 됐습니다.


휴가행렬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서울시내 교통정체가 풀린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脫서울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잠시 일터를 떠나 물놀이를 즐기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랑과 배려,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를 다시 돌아보는 습관, 어려웠던 과거를 떠올리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것도 좋은 피서전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격화될 불볕더위 속에서 저는 불고기 백반 1인분, 우동 한그릇을 생각하며 더위를 식혀볼까 합니다.

권대우 아시아경제신문·이코노믹리뷰 회장 president@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권대우 아시아경제신문 회장 preside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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