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수기자
2026년 국내 증시와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의 실체화'다. 최근 시장을 달궜던 AI 버블 논쟁은 이제 뒤로 밀려나고, 실제로 이익을 만들어내는 기업과 산업으로 자금이 집중되는 차별화 장세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자산운용업계는 반도체를 포트폴리오 중심축으로 하고 AI가 현실 세계에 구현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전력 인프라, 로봇, 소프트웨어, 그리고 정책적 수혜가 예상되는 배당주를 결합한 '입체적 바벨 전략'을 제시했다.
국내 주요 자산운용사들은 내년에도 반도체 업종이 증시 주도주라는 점에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 성격은 '기대감'에서 '확신'으로 변모했다. 삼성자산운용에 따르면 내년 유가증권 시장 상장사 전체 영업이익 전망치는 약 40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했다. 올해 대비 100조원가량 늘어날 것으로 봤다. 전체 증익분 가운데 반도체 업종이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AI 수요 확대가 단순한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기업의 펀더멘털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실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삼성자산운용은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정수를 담은 'KODEX AI반도체'와 글로벌 리더에 집중하는 'KODEX 미국반도체'를 유망 ETF로 추천했다. 김도형 삼성자산운용 ETF컨설팅본부장은 "AI 경쟁이 가속화될수록 반도체는 대체 불가능한 필수 산업으로 자리 잡는다"며 "2026년은 이익 추정치가 지속해서 상향되는 구간인 만큼, 조정 시마다 비중을 확대하는 전략이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역시 AI 중·소형주의 높은 변동성을 경계하며 실적이 검증된 대형주 중심의 '승자 독식' 장세를 예견했다. 변동성 장세에서도 견고한 기초체력을 보여주는 'TIGER 반도체TOP10'과 글로벌 표준인 'TIGER 미국필라델피아AI반도체나스닥'을 핵심 상품으로 꼽았다. 미래에셋 관계자는 "AI 테마 내에서도 옥석 가리기가 심화할 것"이라며 "결국 압도적인 자본력과 기술력을 가진 상위 기업들이 시장의 프리미엄을 독식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하이퍼 스케일러들의 자본지출(CAPEX) 확대가 가져올 낙수효과에 주목했다. 남용수 한국투자신탁운용 ETF운용본부장은 "글로벌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들의 AI 인프라 투자는 2030년까지 연평균 40% 이상의 성장이 예견된다"며 공급망 전체의 수혜를 입는 'ACE 글로벌반도체TOP4 PLUS'와 'ACE AI핵심산업'을 라인업에 올렸다.
반도체 내에서도 가장 가파른 성장이 예상되는 분야는 단연 고대역폭메모리(HBM)다. 한화자산운용은 'PLUS 글로벌HBM반도체'를 통해 메모리 업황의 질적 변화에 주목했다. 윤준길 한화자산운용 ETF운용팀장은 "엔비디아의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인 '루빈 울트라'는 기존 제품 대비 메모리 웨이퍼 소모량이 무려 139% 급증할 것"이라며 "메모리 업체들이 공정 난도가 높은 HBM에 생산 역량을 집중하면서 범용 메모리 공급까지 타이트해지는 '슈퍼사이클'이 장기화할 구조"라고 강조했다.
내년은 AI가 가상 세계를 넘어 물리적 실체(Physical AI)로 확장되는 원년이다. 삼성자산운용은 데이터센터 증설의 가장 큰 걸림돌인 '전력 병목 현상'에서 투자 기회를 찾았다. 발전기, 송전망, 냉각 시스템 등 전력 밸류체인 전반에 투자하는 'KODEX 미국AI전력핵심인프라'를 포트폴리오 대안으로 내놨다.
로봇 분야에서는 한화자산운용의 'PLUS 글로벌휴머노이드액티브'가 부각된다. 단순 조립 로봇을 넘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휴머노이드가 상용화 단계에 진입함에 따라 관련 부품과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가치가 재평가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KB자산운용은 AI의 확산이 이차전지 산업의 '제2도약'을 이끌 것으로 내다봤다. 로봇과 드론, 휴머노이드 등 이동형 AI 기기가 늘어날수록 고성능·고효율 배터리는 필수다.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모를 뒷받침하기 위한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요가 폭발하며 이차전지가 'AI의 에너지원'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KB자산운용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RISE 2차전지TOP10'을 제안했다.
하드웨어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소프트웨어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신한자산운용은 AI 투자의 무게중심이 점진적으로 소프트웨어로 이동할 것으로 봤다. 팔란티어와 같은 AI 플랫폼 기업이 본격적인 수익 모델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SOL 미국AI소프트웨어'를 유망 ETF로 선정했다. 금리 인하 국면에서 성장주로서의 매력이 더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매크로 측면에서의 정책 변화 역시 ETF 투자의 핵심 변수다. KB자산운용은 미국의 금융 규제 완화 흐름을 기회로 보고 'RISE 미국은행TOP10'의 수혜 가능성을 부각했다. 금리 인하 기조와 규제 완화가 맞물리며 은행주들의 자본 효율성이 극대화될 것이라는 논리다.
시장 변동성을 제어할 '방패'로는 배당 ETF가 꼽힌다. 도입 예정인 배당소득 분리과세와 기업 가치 제고(Value-up) 정책은 고배당주의 매력을 높이는 결정적 요인이다. 'RISE 대형고배당10TR' 'SOL 코리아고배당' 'TIGER 코리아배당다우존스' 등은 절세 혜택과 시세 차익을 동시에 노리는 투자자에게 수혜 후보군으로 언급된다.
자산운용업계의 시각을 종합하면 새해 ETF 투자의 승부처는 '조합'에 있다. 반도체와 실물 AI ETF로 포트폴리오의 공격력을 확보하고, 배당 ETF와 금융주로 방어력을 갖추는 구조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테마 유행을 따르는 것보다 산업의 기초체력과 정책적 변화를 정교하게 결합해야 하는 해"라며 "AI와 정책 수혜주를 양축으로 삼는 바벨 전략이야말로 시장의 변동성을 이기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