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은주기자
2015년 발생한 폭스바겐의 디젤게이트(배출가스 조작) 사건은 집단소송제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당시 미국 소비자들은 집단소송을 통해 147억~200억달러 규모의 배상을 받았다. 차량 소유자 1인당 최대 1만달러(당시 약 1200만원)의 현금 보상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투자자들 역시 폭스바겐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해 4800만달러(약 650억원)의 배상을 받았다. 배출가스 조작 사실이 드러난 뒤 미국 증시에 상장된 주식예탁증서(ADR) 가격이 급락하면서 투자자 피해가 발생했다는 점이 일부 인정됐다.
디젤게이트는 폭스바겐이 2015년 9월 전 세계 1070만대의 디젤 차량에 배기가스 배출 관련 소프트웨어를 조작했다고 시인하면서 불거졌다. 주행 시험으로 인식될 때만 배출가스 저감장치가 정상 작동하고, 일반 주행 시에는 작동하지 않도록 설계해 실제 주행 환경에서 산화질소 등 유해물질이 기준치보다 과다 배출된 사건이다.
폭스바겐은 이후 주요국에서 집단소송에 직면했고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다. 독일에서는 약 26만명이 참여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총 8억3000만유로(약 1조1000억원)를 지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반면 집단소송 제도가 없는 한국에서는 피해 차주 일부가 개별 소송으로 진행해 대응해야 했다. 폭스바겐은 한국에서 관련된 차를 12만대 판매했지만 소송을 건 피해자는 2000여명에 불과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법정 싸움이 이어지면서 보상 절차가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한국 시장에서는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 국내 소비자에 대한 피해 배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11년 국내에서 발생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처럼 생명과 관련한 소비자 피해가 크게 발생한 경우에도 관련 피해 회복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집계에 의하면, 환경부에 피해를 신고한 사람은 6817명이며, 그중 사망자가 1553명이다. 파악되지 않은 사망피해자는 1만4000명으로 추산되며, 건강피해경험자는 67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형태의 집단소송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나라다. 특정 분야를 한정하지 않고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진 사건이라면 집단소송을 허용하고, 개인이 별도의 판결제외신고(옵트아웃)를 하지 않으면 대표 피해자가 낸 소송의 판결 효력이 구성원 전체에 미친다. 원고가 승소할 경우 피고 기업이 출자한 자금으로 구제기금이 조성돼 구성원에게 일괄 배분되는 관행도 축적돼 있다. 집단소송에 직면한 기업들은 법원에 파산을 신청하고 구조조정을 거쳐 사업 재편에 나서기도 한다.
미국의 석면 제품 제조사 존스-맨빌은 집단소송으로 파산한 대표적인 사례다. 건축 자재를 생산하는 존슨-맨빌은 석면의 발암성이 알려진 이후에도 제품 판매를 지속했다는 이유로 집단소송을 당했다. 소송 결과 피해자들에게 물어줘야 할 연간 배상액이 수억달러에 달하면서 1982년 파산을 신청했다. 이 기업은 25억달러 규모의 석면 피해자 전용 신탁을 설립해 배상을 별도로 진행하고, 회사를 분리해 더이상 석면 사업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회사 구조를 개편해야 했다.
미국 외에도 주요국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자들의 집단적인 소송제도를 열어놓고 있다. 다만 분야를 한정하지 않고, 소송에서 제외신청을 하지 않는 한 법원의 판결이 '모든 피해자에게' 구속되는 미국식보다는 다소 강도가 낮은 형태로 금전적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영국은 직접 소송에 참여 의사를 표시한 피해자들에게만 판결의 효력 미치도록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다만 2015년 소비자권리법을 통해 경쟁법(공정거래법) 분야에 한해서는 미국식 집단소송을 도입했다. 담합이나 거래상 지위남용 사건의 경우 미국처럼 피해자가 개별적으로 옵트아웃하지 않는 한 법원 판결 효력이 모든 피해자에게 미치도록 한 것이다. 영국은 최근 의견 수렴을 통해 이러한 제외신고형 집단소송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독일은 미국식 집단소송 대신 '표본확인소송' 제도를 통해 집단적 피해구제를 인정한다. 표본확인소송은 소비자단체가 기업을 상대로 불법행위와 책임 존재 여부만을 먼저 다루는 방식으로, 개별 피해자들은 소송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등록만 하면 된다. 법원이 기업의 책임을 인정하면 그 이후 피해자들이 선택적으로 손해배상 소송 청구에 나설 수 있다. 소비자들에게는 기업을 상대로 불법행위와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부담을 줄여주고, 소송 참여를 선택한 피해자들만 배상받을 수 있도록 해 기업의 부담을 동시에 줄여주는 제도다.
일본도 독일과 유사한 형태의 집단소송제도를 운영한다. 일본은 2013년 소비자 피해의 집단구제를 위한 집단소송 제도를 도입해 2016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1단계에서 소비자단체가 사업자를 상대로 배상 책임 존재 여부를 확정하면 2단계에서 피해자들이 참여해 개별 채권액을 확정하는 구조로 소송을 진행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이처럼 소비자들의 기업을 향한 집단적인 금전적 손해배상청구제도가 없는 국가는 한국·스위스·튀르키예 3곳에 불과하다. 그런데 스위스 또한 사실상 집단소송에 준하는 효과를 내는 특별한 제도를 갖추고 있다.
스위스는 전통적인 집단소송을 허용하지는 않지만 손해배상 청구권의 자유로운 양도를 인정해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보장해주고 있다. 폭스바겐 디젤게이트 당시에도 스위스 소비자들은 개별 소송 대신 배상 청구권을 투자 펀드에 양도했고, 해당 기관이 이를 집단화해 대규모 합의를 이끌어냈다.
반면 한국은 이러한 집단적 금전 배상 제도가 없다. 대규모 소비자 피해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개별 피해자가 직접 소송을 제기해야만 제각각 배상을 받을 수 있어 글로벌 기업의 불법 행위에 대해 한국 소비자만 보상에서 배제되는 구조가 이어져 왔다.
2011년 발생한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한 배상 지연이 대표적이다. 2017년 특별법 제정으로 병원비·장례비 등 일부 지원은 이뤄졌지만,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은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확정되지 못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는 2022년 최종 조정안(7027명의 조정 대상 피해자에게 최대 9240억원의 피해 조정 금액 부담)을 내놨지만 가해 기업 중 가장 많은 피해보상금을 부담해야 하는 옥시와 애경이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해당 사안은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민사 소송을 진행하는 단계에 있고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보니 정확한 규모 파악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개별적으로 소송을 진행하는 만큼 특정 판결에서 기업의 배상 책임이 인정되더라도 소를 제기한 피해자에만 해당된다. 국내에도 집단소송 제도가 있었다면 수만 명에 이르는 피해를 한 번의 소송으로 묶어 책임을 빠르게 확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개별 소송이 장기화될수록 과학적 인과관계 입증은 더 어려워지고, 기업은 분산된 소송에 대응하며 시간 싸움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