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욱정 감독은 음식을 통해 문명을 읽고 인간을 탐구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KBS에서 30여 년간 활동하며 예능, 사극, 다큐를 넘나든 그는 프랑스 꼬르동 블루에서 1년 반 간 셰프 과정을 이수한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더 나은 PD가 되기 위해" 회사를 휴직하고 자비로 떠난 요리 유학은 그의 작품 세계를 완성시키는 전환점이 됐다.
이욱정 PD가 10일 서울 중구 요리인류검벽돌집에서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와 대담하고 있다. 2025.11.11 강진형 기자
2008년 <누들로드>로 '푸드멘터리'라는 새 장르를 연 그는 국수라는 음식 하나로 실크로드 문명 교류사를 풀어냈다. 이 작품으로 2009년 한국방송대상 대상, 2010년 피버디상(Peabody Award)을 수상하며 국내외에서 인정받았다. 이후 2015년 <요리인류>로 백상예술대상 TV교양부문 작품상을 받는 등 한국 음식 다큐멘터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2019년 KBS를 퇴사한 후 (주)요리인류를 설립해 대표이사로 활동 중이며, 2021년부터는 '요리를통한도시재생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서울 중구 회현동 검벽돌집에서 도시재생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4년 9월부터는 웨이브를 통해 <롱 리브 더 독>(반려견 건강과 장수), <휴먼크로니클-병원> 등 새로운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선보이며 음식을 넘어 인간과 생명에 대한 탐구를 확장하고 있다.
-반갑습니다. 감독님께서는 KBS에서 오랫동안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활동하셨고, 특히 '누들로드'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본인 소개와 함께 어떤 작업들을 해오셨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다큐멘터리 감독이고요, KBS가 제 첫 번째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었습니다. 영문학과 인류학을 공부했고, 미국에서 방송학도 공부했어요. 조금 특이한 이력이라면 회사에 다니던 중 휴직을 하고 꼬르동 블루라는 세계 3대 요리학교에서 1년 반 정도 셰프 과정을 이수한 경험이 있습니다. 완전히 프로페셔널한 셰프가 되는 훈련이었어요.
제 조리 경험은 회사 MT 가서 고기 구운 것밖에 없었는데, 거기서 정말 현장의 불과 싸움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경험을 했어요. 그 이후 돌아와서 '푸드멘터리'라고 이름 붙인 장르를 초창기에 많이 작업했습니다. 요리 유학 가기 직전에 '누들로드'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요. 제 이력이 조금 독특한 게, 처음부터 다큐멘터리 파트에 들어간 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도 하고 사극 조연출도 했어요. 그래서 한국의 클래식한 정통 다큐멘터리 감독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욱정 PD가 10일 서울 중구 요리인류검벽돌집에서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와 대담하고 있다. 2025.11.11 강진형 기자
-'누들로드'는 단순한 음식 다큐가 아니라 인류학적, 철학적 깊이가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왜 하필 '국수'였나요?
▲인류의 역사를 바꾼 음식은 사실 몇 가지밖에 안 됩니다. 20만 년 넘게 수많은 레시피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음식은 역사의 벽을 넘지 못했어요. 로컬 음식으로 남거나 아예 사라졌죠. 그런데 아주 소수의 음식은 시간의 벽을 넘고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어서 지금 70억 인구가 매일 먹는 음식이 됐습니다. 국수가 바로 그런 음식이에요.
국수의 공통점 중 하나가 '재미'의 요소입니다. 똑같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수제비와 비교해보면, 수제비는 씹을 때 다른 음식과 별로 차별화되지 않아요. 그냥 씹어야 하죠. 하지만 국수는 그 선형의 디자인 자체가 다른 음식이 주지 못하는 체험을 줍니다. 씹지 않고 거의 삼킬 수 있고, 입술을 타고 혀를 건너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그 센슈얼한 느낌, 그 소리 자체가 사람들에게 굉장한 쾌감을 줬을 거예요.
더 중요한 발견은 국수의 탄생 배경입니다. 서방에서는 8천~9천 년 전부터 밀을 재배하고 빵을 만들어 먹었는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국수라는 음식이 안 나왔을까요? 결론은 '삶아 먹는 방식'에서 가능했던 겁니다. 서방의 '구워 먹는' 밀 요리 문화와 동방의 '삶아 먹는' 곡물 요리 문화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에서 만나면서 국수가 탄생한 거죠. 국수는 어느 한 제국이나 천재가 만든 게 아니라, 수천 년의 시행착오와 문화적 다양성, 무명의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낸 합작품입니다.
2008년 '누들로드'로 '푸드멘터리'라는 새 장르를 연 이욱정 PD는 국수라는 음식 하나로 실크로드 문명 교류사를 풀어냈다. 이 작품으로 2009년 한국방송대상 대상, 2010년 피버디상(Peabody Award)을 수상하며 국내외에서 인정받았다.
-요리학교 유학은 더 나은 PD가 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경험이 실제로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많은 분이 <누들로드>가 상을 많이 받아서 포상으로 간 것으로 오해하시는데요. 음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더 잘 만들기 위해 셰프들의 세계를 직접 경험해봐야겠다고 생각으로 제 돈으로 스스로 휴직하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배운 건 단순히 요리 기술이 아니었어요. 요리나 요리사의 세계, 먹거리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도 거기에 담긴 어마어마한 상징과 이야기들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었죠. 방송국에서 요리 프로그램을 만드는 PD나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불과 싸움을 한 현장의 경험이었습니다.
또 하나 알게 된 건, 요리에서 제일 재미난 부분은 마지막에 플레이팅하는 순간인데, 그 빙산 위의 한 접시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야 할 준비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것도 전혀 재미없는 작업들이죠. 그런 현장의 진실을 몸으로 체험한 게 제 작업에 큰 자산이 됐습니다.
이욱정 PD가 10일 서울 중구 요리인류검벽돌집에서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와 대담하고 있다. 2025.11.11 강진형 기자
-음식 분야는 다른 산업에 비해 기술과 자본의 침투가 가장 늦은 영역이라고 하셨습니다. AI와 로봇 시대에 음식과 요리는 어떻게 변할까요?
▲음식 요리 분야는 정말 기술의 침투가 가장 지체된 분야예요. 우리가 입는 옷은 이미 100년 전부터 다른 사람이 만든 걸 사서 입었지만, 음식은 여전히 재료를 사다가 직접 다듬어서 만들잖아요. 이건 마치 실을 사와서 옷감을 짜고 재단해서 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거예요. 전자레인지 같은 최신 테크놀로지가 들어갔지만, 사람들은 그걸 훌륭하다고 생각 안 하고요.
AI와 로봇이 음식 분야를 대체하는 건 시간이 걸릴 겁니다. 골목식당의 좁은 공간, 복잡한 동선, 무엇보다 신선도가 중요한 재료들을 다루는 건 매뉴팩처링하기가 정말 어려워요. 당근 하나도 크기가 다 다르고, 어떤 날은 많이 익은 게 들어오고 어떤 날은 덜 익은 게 들어오죠.
하지만 분명한 건, 가격이 중요하고 빨리 한 끼를 때우는 식당은 기계가 훨씬 빨리 대체할 겁니다. 그리고 코로나를 통해 '손맛'이 위험해졌어요. 사람의 손이 들어가면 오히려 위험하다는 인식이 생긴 거죠. 반면 정서적인 것들, 가격을 지불하고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파인다이닝 같은 식당은 사람이 계속 중요할 겁니다. 결국 초양극화가 일어날 거예요. 정말 실력 있는 셰프들만 남고, 돈 있는 사람만 인간이 만든 음식을 먹는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이욱정 PD가 10일 서울 중구 요리인류검벽돌집에서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와 대담하고 있다. 2025.11.11 강진형 기자
-왜 우리는 음식만큼은 '사람의 손'을 믿고 싶어 할까요?
▲사람들은 기계가 만든 음식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만두 광고나 파스타 소스 광고에서 전자동화된 시설을 절대 안 보여주죠. 우리가 먹는 많은 음식이 이미 자동화된 기계에서 만들어지는데도요.
맥도날드가 좋은 예입니다. 모든 게 공장에서 만들어지는데, 마지막 튀김만 사람이 하잖아요. 그리고 광고에선 그것만 보여줍니다. 실제로 맥도날드 직원들은 감자를 본 적이 없대요. 완성품만 보니까 사람이 해줬다고 착각하는 거죠.
음식은 우리 몸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옷은 걸치는 거고, 집은 그냥 사는 곳이지만, 음식은 나의 내면으로 들어옵니다. 가장 하이리스크한 행위죠. 그래서 정서적일 수밖에 없어요. 수만 년 동안 인류는 가장 친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엄마나 우리 부족의 여인들이 해준 밥을 먹었습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벽 뒤에서 만든 음식을 먹는다는 건 엄청난 사회적 신뢰가 전제돼야 가능한 일이에요. 외식업의 탄생 자체가 굉장한 사회적 신뢰 관계의 산물이라 볼 수 있어요.
이욱정 PD는 2015년 글로벌 대기획 다큐멘터리 '요리인류'를 통해 다시 한 번 각 나라, 지역의 다채로운 요리문화를 소개했다.
-혼자 밥을 먹을 때 많은 사람이 항상 무언가를 보면서 먹어요. 먹방 문화는 어떻게 해석하시나요?
▲인간의 유전자는 혼자 밥 먹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식사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행위입니다. 하지만 가족 구조가 바뀌고 혼자 먹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식사 시간만큼은 혼자라는 감각을 견디지 못하게 됐죠.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으며 휴대폰을 보는 행위는 사실상 전투식량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먹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질적으로는 혼자서 먹는데 혼자라는 느낌을 받기 싫은 거죠. 혼자 일할 때는 괜찮은데, 밥 먹을 때만은 혼자 있기 싫어요. 밥을 혼자 먹는 건 감옥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거기서 며칠 있으면 미치잖아요. 식당도 혼자 가더라도 주변에 여러 사람이 있죠. 1인 식당이라고 해서 손님마다 칸막이로 가둬놓고 혼자 먹게 하면 아무도 안 갈 거예요. 얼마나 불쾌하겠어요. AI와 로봇의 시대가 와도, 누군가와 연결된 정서적 무대 위에서 음식을 먹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AI 시대에는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이 특권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음식의 진짜 가치는 무엇일까요?
▲앞으로 AI와 로봇이 만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설득해야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실제 재료가 아닌 것으로 만든 '페이크 푸드', '토이 푸드' 개념이 생겨날 거예요. 장난감이 실제 기능은 없지만 그것처럼 생긴 것처럼, 초콜릿처럼 생겼지만 카카오가 안 들어간 걸 우리는 초콜릿이라고 속이면서 먹게 될 수도 있어요.
음식의 진짜 가치는 맛이 아닙니다. 맛은 사실 거짓말쟁이예요. 똑같은 고기도 "이건 한우고 어디서 어떻게 키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먹으면 갑자기 맛이 달라지잖아요. 결국 우리는 기호와 상징과 의미를 먹는 겁니다. 그게 다른 동물과 차별화되는 부분이에요.
예전에는 재벌 회장도 골목식당에서 이모님이 끓인 된장찌개를 우리랑 똑같이 먹었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정말 사람이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이 극소수의 특권이 될 겁니다. 그리고 사람과 같이 먹는 것도 특권이 될 거예요. 대부분은 혼자 AI와 대화하거나 콘텐츠를 보면서 밥을 먹겠죠.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동물과 차별화된 지점에 음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음식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무엇일까요?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짐승들과 차별화된 건 공동 작업으로 사냥하고 채집한 걸 현장에서 바로 뜯어먹지 않고 거주지로 가져온 겁니다. 불을 사용한 것도 중요하지만, 요리를 기다려야 한다는 '인내심'도 배웠죠. 그리고 배분이 정말 중요했어요. 고기를 자르는 건 족장이 했고, 거기서 엄청난 권력이 생겼습니다.
동물들은 제일 센 놈이 배 터질 때까지 먹고, 그다음 놈이 와서 먹고, 나머지들은 남는 걸 먹죠. 하지만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배분과 기다림을 배웠어요. 그게 인간을 문명화시킨 겁니다. 우리가 에티켓이라고 얘기하는 모든 것이 거기서 기인했어요. 배고프면 바로 먹는 게 아니라 기다려야 하고, 내 몫이 올 때까지 참아야 하고, 서로를 배려해야 하는 거죠.
원시시대 사람들은 저녁에 불 피워놓고 둥그렇게 앉아서 빵을 나눠 먹으면서 스토리텔링을 했어요. 모든 전설과 신화는 밥 먹으면서 만들어진 겁니다. 사냥하면서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음식이 사회적이었기 때문에 서사가 생긴 거죠. 그 30분 동안 다 같이 얼굴 마주 보고 있으니까 재미있는 얘기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게 된 겁니다.
결국 우리가 음식을 준비하고 요리하고 먹는 전 과정에서 인간다움, 문화의 룰이 다 만들어진 거예요. 그리고 그건 굉장히 사회적인 것이었습니다. AI 시대에도 이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음식은 인간 본성에 가장 가까운 것이고, 의식주 중에서 가장 안 바뀌고 가장 느리게 변할 영역입니다.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김혜연 안무가 여니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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