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기자
에스토니아 정부가 러시아와 접경지대에 설치하고 있는 콘크리트 벙커의 모습. 에스토니아 국방투자센터 홈페이지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이 러시아와의 접경지대에 수천개의 벙커를 연이어 짓는 '벙커 네트워크(Bunker Network)'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와 같이 대부분 평지인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러시아의 포격 공세를 막는데 벙커가 효과적이란 평가가 나오면서 대규모 건설작업이 이어질 전망이다.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수영장이나 기타 편의시설 대신 벙커를 짓는 중산층 가정이 늘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벙커 건설 열풍이 불고 있다.
벙커시설 공사에 투입된 에스토니아 군인의 모습. 에스토니아 국방부 홈페이지
미국 국방매체인 디펜스뉴스에 따르면 에스토니아 정부는 12일(현지시간)부터 러시아와 국경지대에 벙커 건설을 시작했다. 이는 발트3국이 올해 1월 합의한 벙커 네트워크 프로젝트에 따른 것이다. 러시아 국경지대에 에스토니아는 600개, 라트비아는 1116개, 리투아니아는 2758개의 벙커를 지어 합동 방어선, 일명 '발트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들어가는 예산만 3억달러(약 4430억원)에 달한다.
벙커는 35m²(약 10평) 규모로 10명의 군인을 수용할 수 있으며, 러시아군의 주력 포격무기인 152밀리미터(mm) 자주포의 공격에 견딜 수 있도록 콘크리트 박스형태로 지어진다. 벙커 인근에는 대전차 지뢰 및 장애물을 설치해 유사시 러시아군의 진격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당초 에스토니아 국방부는 지난해부터 2027년 말까지 600개를 모두 짓는다고 계획했지만, 건설 시작이 1년 정도 늦춰졌고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고 있다. 디펜스뉴스는 "원자재 가격이 상승한데다 민간 토지 소유자와의 토지매입 협상도 어려움을 겪으면서 비용이 계속 상승하고 있다"고 전했다.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국경지대인 빈스키 일대 지어진 철조망의 모습. AP연합뉴스
발트3국이 벙커 장벽을 설치하려는 이유는 이들 국가들도 우크라이나와 비슷하게 대부분 국토가 평지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발트3국 지역에서 가장 높은 지역은 에스토니아에 있는 수르무나매기로 해발고도가 318미터(m)에 불과하다. 막대한 양의 전차, 전투차량을 보유한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으려면 벙커 방어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연계된 벙커의 방어력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 바 있다. 안드리스 스프루츠 라트비아 국방장관은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2023년 러시아 점령지에 우크라이나군이 반격을 가했지만 수백킬로미터에 이르는 벙커와 지뢰밭으로 이어진 방어선을 끝내 뚫지 못했다"며 "오래되고 저렴한 방어전 해법이 현대전에서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지 보여준 중요한 사례"라고 강조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도 발트3국의 방어선을 기반으로 러시아군의 군사도발을 억제할 '동부전선 억제선(Eastern Flank Deterrence Line)'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크리스 도나휴 나토 연합 육군사령관은 최근 나토군 안보회의 중 하나인 랜드유로 회의에서 "발트 국가들의 방어선을 시작으로 러시아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공용 발사체, 클라우드 기반 협조체계를 개발 중이며 이를 동부전선 억제선이라 부르고 있다"며 "이 억제선은 각 지역의 방어계획을 하나로 묶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고 밝혔다.
독일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가정용 벙커 시설 모습. 독일 BSSD사 홈페이지
독일과 스위스 등 상대적으로 후방에 있는 국가들에서도 러시아에 의한 전쟁위협이 커지자 중산층 가정을 중심으로 집안에 대피용 벙커를 지으려는 수요가 늘고 있다.
독일 민간용 벙커 제조사인 BSSD는 개인용 벙커 설치 문의가 우크라이나 전쟁 전 300건 정도에서 최근에는 1000건에 이르러 3배 이상 늘었다고 밝혔다. 마리오 피에이데 최고경영자(CEO)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인터뷰에서 "과거 부유층이 찾던 벙커, 패닉룸 수요가 중산층 가정까지 확대되고 있다"며 "수영장이나 차고 대신 벙커를 만드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개인·공용 벙커가 37만개로 전국민 수용이 가능할 수준으로 많다고 알려진 스위스에서도 개인 벙커 수요는 꾸준히 증가세다. 벙커 제조업체인 벙커 스위스의 자비에 브룬 CEO는 WP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맞춤형 벙커 설치를 원하는 수요가 늘었다"며 "벙커 1기 가격이 4만~10만달러(약 6000만원~1억5000만원)으로 적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설치에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