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은주기자
정부가 싱가포르의 ‘테마섹’과 GIC(싱가포르투자청)’으로 나뉜 투트랙 국부자금 운용 모델을 벤치마킹해, 기존 KIC(한국투자공사)와는 별도의 한국형 국부펀드를 설립한다. 외환보유액을 위탁받아 해외 투자에만 한정하는 KIC가 GIC와 유사한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새 국부펀드는 테마섹처럼 국내외 산업과 자산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적극적인 투자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를 지향한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2월 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2026년 기획재정부 업무보고' 관련 사후브리핑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기획재정부
11일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세종 정부청사에서 대통령 업무보고 후 브리핑에서 정부가 ‘한국형 국부펀드’ 설립을 추진하는 배경을 설명했다. 정부가 한국형 국부펀드 설립을 추진하는 것은 외환보유액의 안정적인 운용에 묶여 있는 기존 국부펀드 체계의 한계를 넘어, 적극적인 국부 창출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싱가포르 테마섹이나 호주 퓨처펀드처럼 투자 수익을 극대화한다는 관점에서 적극적인 자산운용을 통해 미래 세대의 부를 키우는 모델을 한국형으로 구현하겠다는 구상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유일한 국부펀드는 한국투자공사(KIC)다. KIC는 외환보유액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안정적인 수익을 내야 한다. 고위험, 고수익 투자를 통해 적극적으로 국부를 증식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다. 또 KIC는 한국투자공사법에 따라 위탁받은 자산은 외국에서 외화 표시 자산으로 운용하도록 제한하고 있어, 국내 전략 산업에 대한 투자는 사실상 차단돼 있다. 국회에서 KIC의 역할을 확대해 국내 전략 산업 투자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던 이유다. 구 부총리는 “KIC는 외환보유액을 운영해야 하는 만큼 적극적인 국부창출을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벤치마킹 대상으로 제시한 싱가포르는 GIC(싱가포르투자청)와 함께 테마섹이 서로 다른 투자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GIC는 KIC처럼 국가의 외환보유액을 굴리는 전통적인 국부펀드로 자산가치 보존과 안정적인 수익에 무게를 두고 해외에만 투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초반 서울 강남과 광화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빌딩인 강남파이낸스센터(GFC)와 서울파이낸스센터(SFC)를 사들이고 2018년 토스에 투자하기도 했다.
테마섹은 정부가 보유한 자산과 공기업 지분을 기반으로 출범한 투자회사다. 기업 인수합병(M&A)과 지분, 부동산 투자까지 폭넓게 수행하면서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국부를 증식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싱가포르항공 등 자국 핵심 기업의 대주주로 경영 전략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해외에서는 비자, 마스터카드, 텐센트 등 글로벌 투자에 투자해 성장 산업의 수익을 흡수해왔다. 한국 기업 중에서는 셀트리온에 투자했다.
싱가포르투자공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테마섹과 GIC, 싱가포르통화청(MAS, 중앙은행과 금융당국 역할) 등 3개의 해외투자 기관이 있으며 이들 기관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순투자수익기여(Net Investment Returns Contribution)는 2025 회계연도에 272억달러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수익금은 정부가 교육, 연구개발(R&D), 건강, 환경개선 등 장기적 투자를 하는 데 쓰인다.
정부가 구상하는 한국형 국부펀드는 테마섹의 역할을 구현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KIC가 외환보유액 운용을 통한 안정적 수익을 거두도록 하면서, 한국형 국부펀드를 통해서는 국내외 유망 산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선 국내 투자에 중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구 부총리는 “적극적인 국부 창출을 위해서는 부동산이든 첨단산업이든 바이오든 가리지 않고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면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며 “국내에 있는 벤처에 투자하고, 외국에 있는 좋은 회사는 미리 M&A도 할 수 있도록 해 국부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강기룡 기재부 차관보는 “전략적인 분야에 대한 국내 투자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형 국부펀드의 구체적인 재원 규모는 아직 검토 단계다. 우선은 상속세 물납 제도를 통해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비상장 주식이 거론된다. 구 부총리는 “싱가포르 테마섹도 처음에는 2억달러 정도로 아주 작게 시작했다가 지금 3200억달러가 됐다”며 “처음에 재원을 어마어마하게 마련하기보다는 물납 받은 주식도 재원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어 “국부펀드에 재원으로 들어오게 되면 단순히 매각하는 것이 아니고, 필요하면 더 사기도 하고 경영권을 붙여서 매각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강 차관보는 “안정적인 재원 조달과 재정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기대하는 효과는 국부 창출의 선순환이다. 초기에는 적은 재원으로 출범하더라도, 국내 유망 벤처기업이나 수익성이 높은 전략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로 기업 가치를 키우고, 장기적으로는 해외 유망 기업이나 부동산에도 투자하는 구조를 만든다는 구상으로 보인다. 이렇게 축적된 수익을 다시 미래 산업에 재투자하며 펀드 규모가 커지도록 한다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