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강나훔기자
정부가 미국의 '검증된 최종사용자(Validated End User·VEU)' 제도 철회에 따른 후속 대응에 착수했다. 미국 상무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국 법인에 부여해온 VEU 지위를 전격 철회하면서 내년부터는 중국에 미국산 장비를 들여오기 위해서는 건별 수출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현실화됐다. 우리 정부는 우선 VEU 철회 자체를 되돌리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협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기업들의 행정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포괄허가 제도 유지나 신속 심사 절차 같은 간소화 방안을 대안으로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1일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목표는 당연히 철회된 조치가 다시 철회되는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미국도 VEU 제도를 바이든 정부의 유산으로 인식하는 측면이 있어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철회가 어렵다면 우리 기업에 피해가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협의를 이어가겠다"며 "패스트트랙 심사, 여러 장비를 묶어 승인하는 방식 등 다양한 대안을 고려할 수 있다. 우리 업계가 무엇을 선호하는지, 또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이 어떤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따져 협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VEU 제도는 미국 정부가 특정 기업을 '검증된 최종사용자'로 지정해놓고 해당 기업이 중국 공장에서 사용하는 미국산 장비·부품에 대해 포괄적으로 허용하는 방식이다. 삼성전자 시안 낸드플래시 공장과 SK하이닉스 우시 D램 공장은 이 제도를 바탕으로 장비 반입 시 건별 허가 절차를 면제받아 왔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내년부터는 장비 반출 건마다 BIS의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단순히 기업의 행정 부담에 그치지 않고 허가 지연에 따른 공정 가동 차질, 납기 일정 불확실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우려다. 실제로 기업 내부에서는 장비 반입이 수 주일씩 지연될 경우 생산 라인이 멈출 수 있다는 현실적 불안감이 감지된다.
BIS는 VEU 철회로 인해 연간 1000건 이상의 수출허가 신청이 추가로 발생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이는 우리 기업의 부담뿐만 아니라 미국 당국의 업무 부담도 크게 늘어난다는 의미다. 결국 BIS 입장에서도 포괄허가나 패스트트랙 같은 간소화 절차를 도입할 유인이 생긴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이 조치가 한미 정상회담 직후 불과 나흘 만에 발표된 데 주목한다. 단순한 행정 절차라기보다는 한국에도 중국과 기술 협력 거리를 두라는 압박 신호로 읽힌다는 해석이다. 특히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라는 미국의 전략적 메시지가 담겼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와 관련 중국 상무부는 "반도체는 글로벌 산업망으로 얽힌 분야"라며 "이번 조치는 공급망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반발했다. 또 자국 기업을 위한 '적절한 대응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복잡한 한·미·중 이해관계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 구도 속에서, 향후 120일의 유예기간은 협상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우리 정부는 이 기간 미국 BIS와 세부 협의를 이어가면서 기업 의견을 수렴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허가 체제가 어떤 형태로 바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 기업 운영에 차질이 최소화되도록 끝까지 협의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