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중재 실무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중재지는 런던, 싱가포르, 홍콩, 베이징 순서였다. 선호 중재지에 자리한 중재기관, 홍콩국제중재센터(HKIAC),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런던국제중재법원(LCIA)의 중재 규칙도 실무자들은 선호했다. 중국은 베이징 외에도 상하이, 광저우 등 주요 도시들이 선호 중재지에 이름을 올렸다. 중국 중재기관의 규칙도 선호도 순위권에 오르며 국제중재 무대에서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서울과 대한상사중재원(KCAB)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글로벌 로펌 '화이트&케이스(White & Case)'는 최근 영국의 퀸메리 런던대(QMUL) 국제중재학교와 함께 '2025 국제중재 설문조사: 앞으로의 길 - 국제중재의 현실과 기회'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에는 전 세계 변호사, 중재인, 중재기관 관계자, 학계 인사, 중재판무관(tribunal secretary) 등 2402명이 참여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사진. 픽사베이
'선호 중재지'를 묻는 질문에 영국 런던은 응답자 34%의 선택을 받으며 1위에 올랐다. 런던을 꼽은 응답자들은 △높은 판정 집행 신뢰도 △효율적인 사법 시스템 등을 이유로 들었다.
싱가포르와 홍콩이 각각 31%의 응답자의 지지를 받으며 런던의 뒤를 이었다. 싱가포르를 선택한 응답자들은 △싱가포르 정부의 국제중재에 대한 우호적 태도 △싱가포르 사법부의 중재 판정 존중 △절차 효율성 등을 장점으로 들었다.
홍콩을 고른 응답자들은 △홍콩의 유서 깊은 중재 문화와 △중국 본토에서의 판정 집행력을 이유로 언급했다.
중국 베이징(20%)이 프랑스 파리(19%)를 제치고 4위에 오른 게 눈에 띄었다. 선전(19%)이 공동 5위, 상하이(11%)가 8위, 광저우(6%)가 공동 11위를 기록하며 홍콩을 제외하고도 중국 도시 4곳이 선호 중재지로 실무가들의 낙점을 받았다.
중국 도시들의 약진 배경에는 △중국 기업의 상업적 영향력 확대 △중재 경험 축적 △아시아·태평양 지역 실무자들의 강력한 지지 등이 꼽힌다. 유럽·북미 응답자 중 일부는 "향후 아시아 지역을 중재지로 고려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다른 응답자는 "중재는 동쪽으로 이동 중이다(Arbitration is moving east)"고 표현하기도 했다.
'선호 중재규칙' 조사에서도 중국 본토의 중국국제경제무역중재위원회(CIETAC), 심천국제중재원(SCIA), 광저우중재위원회(GZAC)의 규칙이 모두 상위 15위 안에 포함됐다. 다만 일부 응답자는 "중국 본토 내 판정 집행이 여전히 어렵다"고 했다.
다만 일부 전문가는 이번 설문 결과가 실제 현장에서 체감하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다. 한 국제중재 전문가는 "중국계 응답자가 많이 참여해 중국 도시·기관이 높은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중국의 존재감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에서의 중재가 아직까지 절차적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한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서 서울과 KCAB는 선호 중재지·중재규칙 부문 모두에서 순위에 들지 못했다. 최대 5곳까지 복수 응답이 가능했음에도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보고서 전체에서도 한국 관련 언급은 없었다.
한 중견 중재 전문 변호사는 "중국은 아직까지 법원이 중재에 친화적이거나 중재 판정 집행이 잘 된다고 보기 어려운데도 선호 중재지로 꼽힌 데는 중국 기업들의 엄청난 거래량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며 "기업들이 좋든 싫든 중국에서의 중재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수년 전부터 중재 발전을 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했고, 선전은 최근 대규모의 첨단 중재 시설을 갖췄다"며 "한국이 중재 분야 투자를 소홀히 하는 동안 중국이 앞질러 갔다"고 말했다.
다른 중재 전문 변호사도 "한국 법원은 중재 친화적이고 사법 시스템도 수준이 높고 안정적이지만, 우수한 판례·제도를 소개하는 영문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중재 선진국인 싱가포르, 홍콩은 물론 중국의 도시들과 경쟁하려면 영문으로 된 정보와 자료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첨단 시설·설비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정부 차원의 장기적인 투자가 부족한 실정"고 지적했다.
이번 조사에서 미국은 뉴욕(13%, 7위)과 워싱턴 DC(4%, 14위)만 선호 중재지에 이름을 올렸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중재 전문 변호사는 "전통적으로 미국 기업들은 중재보다 소송으로 분쟁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거래 상대방에게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협상력도 갖췄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 중재기관보다 미국 법원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기업이 많고, 이에 따라 미국 내 법원에 분쟁을 가져와 결과를 보려 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고 했다.
홍윤지 법률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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