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은기자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여천NCC가 모기업에 지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당장 360억원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각종 비용 등으로 연말까지 3000억원이 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또 여천NCC 외에 국내 석유화학기업 곳곳에서 구조조정을 놓고 파열음이 커지고 있다. 업계 자율에 맡겨선 더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천NCC 고위 관계자는 11일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나프타 재판매와 매출채권 조기 회수 등으로 긴급 자금을 마련했지만 오는 21일부터 약 360억원의 부족분이 발생한다"며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처한다"고 말했다. 앞서 여천NCC는 올 연말까지 3000억원이 더 필요하다 밝힌 바 있다. 이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카드 대금·신용장(LC) 대금·원료구매대금·회사채 상환·급여 등으로 8월 말까지만 해도 총 1800억원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여천NCC는 1999년 한화솔루션(당시 한화석유화학)과 DL케미칼(당시 )이 각각 지분 50%를 출자해 설립한 합작사다. 국내 에틸렌 생산능력 3위로 생산량 14%를 담당하는 핵심 사업자다. 한화솔루션은 추가 자금 지원 의사를 공식화했지만 DL케미칼은 경영 실태부터 점검해야 한다며 입장을 유보하고 있다. 이날 오전 DL케미칼은 자금 지원 여부를 논의하는 이사회를 개최한다.
여천NCC 유동성 위기는 국내 석화 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한 사례일 뿐이다.
대산석유화학단지에서는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가 나프타분해시설(NCC) 통합을 놓고 수개월째 이견을 좁히지 못하며 속도가 더디다. 중복 설비와 인력을 줄이는 과정에서 지분 구조에 따라 책임을 어떻게 분담할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양사는 롯데케미칼(연산 110만t)과 HD현대케미칼(연산 85만t)이 각각 운영하고 있는 대산 NCC 설비를 단일 법인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현재로선 통합 시 롯데케미칼 설비를 HD현대케미칼로 이관하고 HD현대오일뱅크가 추가 출자해 운영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그러나 HD현대오일뱅크는 정리해고를 마친 뒤 합류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진 반면, 롯데케미칼은 '60% 지분을 보유한 HD현대오일뱅크가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HD현대오일뱅크 측은 "통합 논의와 관련해서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는 없다"고 말했다. 단순한 설비 효율화 단계를 넘어 인력 감축 범위와 책임 소재가 통합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한 셈이다.
부도 위기에 몰린 여천NCC는 인력 재배치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여천NCC는 여수 3공장(연산 46만t) 가동을 중단했다. 전체 직원 1050명 가운데 감축이나 재배치는 없었고 3교대를 중단해 주간 중심의 관리 근무 체제로 전환하며 야간 수당을 줄이는 정도에 그쳤다. 업계에서는 "공급과잉 구조를 해소하려면 물리적 감산에 맞춰 인력을 재배치하는 조치가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천NCC 제1공장 전경. 아시아경제 DB
구조조정은 시급을 다투는 중요한 사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글로벌 공급 구조 변화가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2024년 기준 세계 에틸렌 생산능력은 중국이 5134만t(점유율 22.8%)으로 1위, 미국 4642만t(20.6%), 사우디아라비아 1763만t(7.8%), 한국 1295만t(5.7%) 순이다. 중국은 2021년 2위에서 2022년 1위를 탈환한 이후 매년 수백 만t씩 증설하고 있으며, 2028년에는 7000만t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원가 경쟁력 측면에서도 한국은 불리하다. 나프타 의존도가 83%로, 중국(나프타 50%+석탄화학 22%), 미국(에탄 77%) 대비 원가 변동성에 취약하다. 국제유가가 오르면 원가 부담이 곧바로 반영되는 구조여서 저가 에탄이나 석탄화학을 병행하는 경쟁국과의 격차가 확대된다.
국내 석화 산업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건 기업들의 이해관계뿐 아니라 지역 경제의 중추를 맡고 있다는 점에서도 쉽지 않다. 직접 고용 3만9000명, 후방 산업 1만2000명, 전방 산업 38만8000명 등 총 44만명이 종사하고 있다. 에틸렌 생산능력은 여수 626만5000t, 대산 477만5000t, 울산 176만t 규모로, 세 거점이 동시에 구조조정 압박을 받으면 지역경제 전반에 심대한 충격이 불가피하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기업이 '고용 충격 최소화'와 '설비 효율화'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풀어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지훈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대표 파트너는 지난 6월 국회미래산업포럼에서 "정부가 재편 과정에서 발생할 인력 재배치에서 금융 인센티브를 충분히 제공해야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며 "산단별로 맞춤형 재편 방향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