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취재본부 민찬기기자
(왼쪽부터) GIST 신소재공학과 윤준연 박사과정생·황준호 박사과정생·이은지 교수.
광주과학기술원(GIST)은 신소재공학과 이은지 교수 연구팀이 결정성을 가진 블록 공중합체가 용액 속에서 스스로 조립되고 나노입자로 진화하는 전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정량적으로 분석했다고 26일 밝혔다.
이번 연구는 지금까지 이론적으로만 존재했던 '스케일링 이론'의 핵심 가설을 세계 최초로 실험적으로 입증한 사례로, 정교한 나노소재 설계를 위한 과학적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스케일링 이론은 결정성 블록 공중합체가 용매와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접히고, 에너지가 가장 안정한 형태로 조립된다는 이론이다. 특히 낮은 곡률(구부러짐이 적은 형태)을 선호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연구팀은 고분자 나노구조가 구형 마이셀(spherical micelle)→ 실린더(cylindrical micelle)→ 도넛형 토로이드(toroid)→ 이중막 구조의 베지클(vesicle)로 진화하는 명확한 경로를 실시간으로 포착했다.
실시간 액상 투과전자현미경을 이용한 양친매성 블록공중합체의 결정화 유도 자기조립 과정 규명.
자연계는 복잡한 구조를 스스로 만드는 '자기조립(self-assembly)'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고성능 나노소재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중 '고분자 결정화'는 고분자 사슬이 스스로 접히고 규칙적으로 배열되는 현상으로,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하는 복합 구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와 관련된 기술인 '결정화 유도 자기조립'은 고분자의 결정화가 구조 형성을 이끄는 원리로, 분자 배열의 규칙성과 입자 구조의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어 광전자, 바이오 소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결정화와 블록 간 분리가 동시에 일어나는 복잡성 때문에 지금까지는 구조 전이의 구체적 메커니즘을 실험적으로 규명하기 어려웠다.
연구팀은 대표적인 생분해성 생체적합 고분자인 PEO-b-PCL을 이용해 분자량과 블록 구성비에 따른 자기조립 과정을 LP-TEM으로 실시간 관찰했다. PEO-b-PCL은 물에 잘 녹는 PEO와 소수성·결정성인 PCL이 결합된 고분자로, 환경친화적이며 약물 전달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그 결과, 결정성이 없는 고분자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구형 나노입자들이 측면 결합을 통해 실린더나 도넛형 토로이드 형태로 진화하는 현상을 명확히 포착했다. 이는 결정성 코어 블록이 시스템의 에너지를 낮추기 위해 낮은 곡률, 즉 더 평평한 계면을 선호하는 특성 때문이며,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스케일링 이론'의 핵심 가정을 실험으로 입증한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
이번 연구의 또 다른 의미는, 단순히 나노구조의 형상을 시각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대별 영상 데이터를 정량 분석해 입자의 이동 경로, 조립 속도 등 수치적 데이터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황준호 박사과정생(제1저자)은 "이번 연구는 고분자 자기조립이 일어나는 분자 수준의 원리와 동역학을 정밀하게 규명한 첫 사례다"며 "향후 유기전자, 바이오센서, 약물전달체 등 첨단 기술에 필요한 나노구조를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이은지 교수는 "이번 연구는 고분자 나노구조의 형성과 진화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정량 분석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며 "특히 결정화 유도 자기조립이라는 복합 현상이 나노구조의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험적으로 입증함으로써, 기능성 나노소재의 새로운 설계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GIST 신소재공학과 이은지 교수(교신저자)가 지도하고 황준호 박사과정생(제1저자)·윤준연 박사과정생(공동저자)이 수행했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서명은 교수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UC Irvine) 화학과 조지프 P. 패터슨(Joseph P. Patterson) 교수가 공동저자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