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경제 중심지 싱가포르는 인구 500만명의 작은 도시 국가이지만 한국에는 무척이나 중요한 파트너 국가로 손꼽힌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G2 사이에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첫 번째이고 급속히 부상 중인 '글로벌 사우스' 지역의 핵심축을 담당한다는 점이 두 번째다. 한국과 싱가포르는 똑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있으며, 양국이 협력할 경우 무역이나 기술 분야에서 기대 이상의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 이러한 싱가포르에서 이달 초 중요한 선거가 있었다. 권력의 향배를 결정하는 총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지난 3일 싱가포르는 다시 한번 인민행동당(PAP)의 압승을 선택했다. 젊은 총리 로렌스 웡(53)은 첫 총선을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국민에게 추인받았다. PAP는 전체 97석 중 87석을 확보했고, 총득표율은 65.57%로 직전보다 4.4%포인트 상승했다. 웡 총리는 PAP 역사상 최초로 '초선에서 지지율을 올린 총리'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또 한 번의 압승, 웡 총리 신임
이번 승리는 단순한 재신임을 넘어 PAP가 지난 5년간 달성한 경제 회복과 전략적 외교, 그리고 국민의 정치적 기대에 정교하게 부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싱가포르는 빠르게 회복해 글로벌 기업의 '탈중국·탈홍콩' 대체지로 떠올랐으며,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0만달러 선을 넘나든다. 전 세계 주요한 글로벌 기업들은 싱가포르를 '아시아의 거점'으로 삼고 있다. 과거 홍콩과 도쿄의 위상을 빼앗아 간 것이다.
로렌스 웡 싱가포르 총리. EPA 연합뉴스
2025년 1분기 성장률은 3.8%로 다소 낮았지만 반도체·생명과학·친환경 에너지 등 첨단 산업에서의 선제적 투자는 중장기적 안정감을 제공했다. 고용 회복 역시 주요 선진국 대비 빠르게 진행됐다. 유권자들은 이러한 성과에 "안정 속 성장"이라는 판단을 내린 셈이다.
웡 총리는 재무장관 시절부터 '재정의 지속 가능성'과 '디지털화 기반 구축'을 주요 과제로 삼아 재정적자와 구조조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복지·주택정책의 균형을 유지해왔다. 2024년부터 시행된 'Forward Singapore' 로드맵은 산업 전환, 사회안전망 강화, 세대 간 형평성이라는 세 가지 기둥으로 유권자들에게 실질적인 신뢰를 주었다.
이번 선거를 이해하는 열쇠는 웡 총리의 '절묘한 외교 줄타기'다. 지난 4월16일 'S. 라자라트남 강연'에서 그는 "우리는 미국, 중국, 유럽 모두와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며 "하나의 친구만 있는 세계는 원하지 않는다"며 중립 외교 원칙을 분명히 했다. 전임 리셴룽 총리의 '균형 외교' 기조를 계승하면서도 웡 총리는 더욱 명시적으로 아세안 연대와 규범 기반 국제질서에 방점을 둔 것이다.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 속에서도 싱가포르는 이를 단순한 외풍으로 보지 않았다. 웡 총리는 "우리 수출품은 아세안과 중국을 거쳐 부가가치를 얻는다"며 미국의 일방적 조치가 자국 경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했다. 싱가포르는 아세안과의 협의 끝에 보복은 피하면서도 공동 대응을 강화하는 절충책을 선택했다. 외교를 정부의 전유물이 아닌 사회 전체의 책무로 본 그의 시각은, 언론·기업·학계·시민사회도 '국가의 원칙 있는 행동'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통치의 정당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침체한 야당, 치순좐의 아쉬움
한편 이번 선거는 유권자의 정치의식 변화도 드러냈다. 과거 'PAP 견제'라는 감정이 야당 지지의 원동력이었다면, 이제는 야당에도 정책·신뢰·비전을 요구한다. 국민연대당(NSP), 개혁동맹(PAR), 인민권력당(PPP) 등은 선거보증금 몰수라는 굴욕을 겪었다. 이는 싱가포르 유권자들이 단지 반대만 외치는 정치세력에는 더 표를 주지 않는다는 명확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정치 구조는 비례대표 없이 단일 선거구 중심으로 운영되며 사전 선거 유세·재정운용·미디어 접근 등에서 여당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구조다. 이 가운데 노동당(WP)은 10석을 유지하며 야권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았다. 추가 의석을 얻진 못했지만 정책 전문성과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꾸준한 지지를 얻었다. 프리탐 싱 대표는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며 제1야당의 역할을 다짐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합리적 견제세력'이라는 이미지를 확보한 WP는 향후 싱가포르 정치의 복수정당제를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아쉬운 이름은 치순좐(Chee Soon Juan·63) 박사였다. 싱가포르민주당(SDP) 대표인 그는 1992년부터 선거에 참여하며 PAP 체제에 맞서왔다. 셈바왕 웨스트 선거구에서 46.81%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그는 과거 무허가 연설, 시민 불복종, 출판 금지 등으로 여러 차례 구금되고 벌금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정치적 끈기와 도덕적 일관성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었다.
2021년 그는 아내와 함께 '오렌지 앤 틸(Orange & Teal)'이라는 카페를 열어, 정치적 소통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정치는 단지 국회 안에서의 경쟁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공공 담론 속에서의 실천임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정치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방식은 달라졌다"는 그의 말은, 패배한 정치인의 넋두리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깊은 통찰처럼 들린다.
2025년 총선은 싱가포르가 여전히 안정과 실용을 중시하는 사회임을 보여주었다. 웡 총리는 국내 경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유권자의 신뢰를 얻었고, 아세안 중심 외교와 글로벌 공급망 변화에 대응하는 전략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성공이 미래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은 더욱 격화되고 있고, 글로벌 보호무역 기조는 싱가포르와 같은 무역 의존형 도시국가에 근본적 위협이 되고 있다. 아세안 내 위상 강화, 기술혁신 생태계의 재구축, 중산층의 불안정성 완화는 앞으로 싱가포르가 마주할 주요 과제다. 웡 총리의 승리는 그런 과제들 앞에서 선택받은 '기회'이자 '책임'이다. 그의 리더십이 앞으로도 유능함뿐 아니라 유연함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지는, 지금부터가 진짜 시험대다.
정호재 아시아비전포럼 사무국장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