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민기자
최영찬기자
"여러분 저는 이 나라가 잘되게 하는 데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탄핵소추안 가결 이틀 만인 16일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직후 당 대표로서 마지막 퇴근길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수십 명의 지지자를 만나 이같이 말했다. 자신의 사퇴에 슬퍼하고 분노하는 지지자들을 진정시키고 안심시키는 동시에 정치활동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보인다.
차량에 탑승하러 이동하는 한 전 대표의 곁엔 권성동 당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와 윤상현 의원, 박정하 의원, 한지아 의원이 있었다. 한 전 대표는 차량 앞에 멈춰 선 뒤 권 권한대행의 어깨를 두드리며 "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후 카메라를 바라보며 "당을 잘 이끌어달라.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달라. 고맙다"며 90도 인사한 뒤 차에 올라탔다.
한 전 대표의 차량을 얼마 못 가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지지자들은 눈물을 보이거나 한 전 대표의 사퇴에 억울함, 분노를 표했다. 지지자들이 울먹이며 "대표님 지켜드리겠다" "한동훈 화이팅"을 연호하자 한 전 대표는 닫았던 차 문을 열고 "여러분 저를 지키려고 하지 말라"라며 "제가 여러분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날 준비했던 한 전 대표의 기자회견문이 적힌 종이를 한 유튜버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한 전 대표가 "난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한 건 이 다음이었다. 한 전 대표는 지지자들이 떠나지 않자 한 번 더 문을 열고 나와 "여러분 추운 날 나와줘서 고맙다"며 이처럼 말했다. 한 전 대표를 태운 차량은 그렇게 국회를 떠났다.
한 전 대표가 떠난 뒤 일부 지지자들은 "배신자 박정하" "배신자 장동혁 어딨어"라며 친한(친한동훈)계 의원에게 화가 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박정하 의원과 한지아 의원, 서범수 의원은 "그런 것 아니다"며 지지자들을 진정시켰다.
"잠깐 많은 생각이 스쳐 갔고, 마음이 아픈 지지자들을 생각하면 고통스럽지만, 여전히 후회하지 않는다."
한 전 대표는 이날 오전 10시30분 국회에서 열린 당대표 사퇴 기자회견에서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열린 의원총회에서 당내 의원들의 사퇴 압박을 받았을 때 한 기자로부터 '탄핵 찬성을 후회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던 일을 회상한 뒤 이같이 말했다. 한 대표는 "최고위원들의 사퇴로 최고위원회가 붕괴돼 더 이상 당 대표로서 정상적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게 됐다"고 전했다. 지난 7·23 전당대회에서 62.84%의 득표율로 제3대 국민의힘 당 대표로 선출된 이후 146일 만의 사퇴다.
앞서 지난 14일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한 대표는 "직무를 계속 수행하겠다"며 버티기를 시사한 바 있다. 그러나 '팀한동훈'이었던 장동혁·진종오 의원을 비롯해 국민의힘 최고위원 전원이 사퇴한 데다 직접 비대위원장을 임명하는 것은 여권 내 유력 대권 후보로서 더 버티는 것은 향후 정치 행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 대표는 "탄핵이 아닌 이 나라에 더 나은 길을 찾아보려 백방 노력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며 "모두가 제가 부족한 탓이다.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령을 저지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 국민의힘은 12월3일 밤 당 대표와 의원들이 국민과 함께 제일 먼저 앞장서서 우리 당이 배출한 대통령이 한 불법 계엄을 막아냈다.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켰다"며 "저는 그것이 진짜 보수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에 반대하고, 당 대표 사퇴·탈당을 촉구하는 친윤(친윤석열)계 인사들을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한 대표는 "우리 당에서 배출한 대통령이 한 것이라도 우리가 군대를 동원한 불법 계엄을 옹호하는 것처럼 오해받는 것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해낸 이 위대한 나라와 그 국민을, 보수의 정신을, 우리 당의 빛나는 성취를 배신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 계엄군이 투입된 것과 여권 일각에서 부정선거를 의심하는 것을 겨냥해서도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나 극단적 유튜버 같은 극단주의자에 동조하거나 상업적으로 생산하는 공포에 잠식당한다면 보수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야권의 유력 대권후보로 꼽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민주당을 향해서도 "계엄이 잘못이라고 해서 민주당과 이 대표의 폭주와 범죄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며 "이 대표 재판의 타이머는 멈추지 않고 가고 있다. 얼마 안 남았다"고 강조했다.
한 대표가 사퇴하면서 국민의힘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5번째 비대위를 맞게 됐다. 이미 국민의힘 전국위원장을 맡은 이헌승 의원도 전날 비대위원장 임명 절차를 밟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야당이 조기 대선 가능성에 대응을 시작한 상황에서 국민의힘도 당을 수습하고 후보를 내기 위해서는 더 늦출 수 없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국민의힘은 이날 오후 3시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당내 수습책과 비상대책위원장 인선을 위한 논의를 한다. 새 비대위원장에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권영세 의원, 나경원 의원,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 김기현 의원 등이 폭넓게 거론되고 있다. 의원총회에 앞서 4선 중진의원들은 오전 11시에 회의를 열고 수습 방안을 논의할 방침이다.
비대위 체제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국민의힘의 내홍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부결 당론을 고수했던 친윤(친윤석열)계와 대구·경북(TK)·중진의원 등 주류세력이 탄핵 찬성을 촉구한 한 대표와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에게 탈당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헌 저지선(100명)이 무너지더라도 찬성표를 던진 최소 12명을 당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여전히 여권 내 유력 대선 후보인 한 대표가 대선권가도에 올라탄다면 당내 갈등은 더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부 친한계와 원외 인사들은 이들의 발언을 "인민재판"이라고 받아치고 있다. 신지호 조직부총장은 이날 오전 MBC라디오에서 "인민재판, '개딸 전체주의'적 모습이다. 단순히 배신자 프레임으로 하는 건 헌법정신과 국회법에 어긋난다"며 "사고는 대통령이 쳤는데 책임은 당 대표에게 뒤집어씌우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이종철 국민의힘 성북구(갑) 당협위원장은 이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은 한 대표에 대한 비판을 삼가야 한다. 한 대표를 치욕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며 "비상계엄 날 한 대표가 한 행동이 보수를 구했다는 것을 모르겠다는 말인가. 지난 2주간 한 대표가 보여준 리더십 덕분에 그나마 보수가 다시 설 실낱같은 희망이 존재하게 됐음을 모르겠단 말인가"라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당내 수습을 위해 혼란을 야기하는 발언은 자제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탄핵소추안과 윤 대통령 출당·제명 조치에 강하게 반대해온 윤상현 의원은 이날 SNS에 "탄핵을 막지 못한 우리 모두가 탄핵의 부역자라는 자성을 해야 할 판에, 찬탄(탄핵 찬성) 투표자를 부역자로 낙인찍고 주홍글씨를 새기는 것은 우리가 신봉해온 보수의 가치와도 어긋나는 일"이라며 "우리가 윤 대통령을 지울 수 없듯이, 찬탄 의원들 역시 우리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동지들"이라며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