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정일웅기자
2020년부터 올해 8월까지 확인된 해외 기술유출 정황은 총 97건에 이른다. 만약 기술유출 시도가 성공했다면, 23조원대 피해액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는 이러한 해외 기술유출 범죄를 예방·차단하기 위해 선제 대응을 강화하기로 했다.
특허청은 1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열린 ‘제244차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글로벌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술유출 대응 방안’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대응방안은 반도체·이차전지 등 첨단 산업 분야 기술유출 시도를 차단해 국가적 피해를 예방하고, 중소·벤처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기술탈취를 방지할 국가 기술보호 체계를 확립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우선 특허청은 특허빅데이터 분석으로 기술유출 정황을 사전에 포착해 방첩기관과 공유하고, 즉각적인 수사로 연계하는 등 선제적 기술유출 방지 체계를 구축한다.
특허청이 보유한 특허빅데이터는 전 세계 기업·연구소·대학 등이 생성한 고급 기술정보의 집약체로, 5억8000만 건에 이를 만큼 방대하다. 무엇보다 특허빅데이터는 글로벌 연구개발 동향과 기술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어 이를 분석해 기술유출을 탐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서 특허청은 현재 보유한 특허빅데이터의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4월 국가 방첩기관으로 신규 지정됐다.
대응방안에는 특허청 내 기술 전문 인력을 활용해 범정부 기술유출 수사를 고도화하는 방안도 담겼다. 기술유출 수사를 위해서는 기술 유사성 판단이 필수적이다. 이를 고려해 특허청은 정보·수사 기관의 요청이 있을 때 특허심사·심판 전문가가 기술범죄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을 지원할 기술자문 체계를 갖춘다는 계획이다.
여기에 ‘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부경법)’ 개정을 추진해 갈수록 지능화되는 기술유출 수법에 핀셋 대응이 가능하도록 영업비밀 보호제도를 세밀하게 정비하겠다는 게 특허청의 설명이다.
핀셋 대응은 기술유출을 목적으로 이직을 알선하는 등 영업비밀 침해 행위에 민·형사적 구제가 가능하도록 하고, 영업비밀 유출에 대한 신고포상금제도 도입 추진과 영업비밀 재유출 행위 처벌 제도 신설 등으로 이뤄진다. 영업비밀 재유출은 외국 기업이 한국 자회사를 통해 영업비밀을 해외로 유출하는 등 신종 기술유출 수법을 말한다.
대응방안은 기술침해 피해 기업을 위한 구제 방안에도 무게를 둔다.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기술침해 소송의 승소율과 손해배상액이 현저히 낮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한국형 증거수집 제도’ 도입을 추진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제도는 법관이 지정한 전문가가 기술침해 현장에서 자료를 수집·조사하도록 하고, 법원 직원이 주재해 당사자 간 증인 신문을 가능케 함으로써 증거수집에 어려움을 겪는 벤처·중소기업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고도의 기술적 판단이 요구되는 기술침해 소송의 재판에서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기술침해 사건 관할 집중도 추진한다.
소송 관할 집중은 현재 특허권·실용신안권·디자인권·상표권·품종보호권 사건의 민사 본안에만 적용된다. 하지만 앞으로는 영업비밀, 산업기술 보호, 부정경쟁행위 사건 등 민사 본안 및 가처분, 형사까지 적용을 확대한다는 게 특허청의 설명이다. 소송 관할 집중 재판은 1심 서울·수원·대전·대구·광주·부산 등 지방법원, 2심은 특허법원에서 집중해 열린다.
김완기 특허청장은 “고도화·지능화되는 해외 기술유출 시도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부의 대응 방식도 보다 세밀해져야 한다”며 “특허청은 특허데이터와 기술 전문 인력을 활용해 기술유출을 조기에 포착하고, 신속한 수사로 빈틈없는 기술보호 제도를 구축하는 데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