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공들인 고급차 이미지, 무너지는 건 '순식'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가 13일 배터리 수급처를 공개했다. 인천 아파트 전기차 화재 사고가 난 후 열흘 이상 지난 시점이었다. 그간 알려졌던 것과 다른 배터리가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도 본사 방침 등을 들어 비공개 입장을 고수했는데 여론이 악화하고 정부가 권고하자 곧바로 공개했다. 제대로 알릴 의지만 있었다면 언제든 공개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벤츠 전기차를 산 한 소비자는 구입 당시 SK 배터리를 쓰는 줄 알았다고 한다. 사고 후 배터리 제작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따로 알아보니 중국 배터리 업체 닝더스다이(CATL) 제품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어떤 이는 구매 당시 딜러에게 LG 배터리를 쓴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다른 배터리가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됐다.

이번에 회사가 공개하기 전까지 많게는 1억원 이상을 쓴 차주들은 전기차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해외 사이트나 검색 엔진을 샅샅이 뒤져가며 찾아야 했다. 국산 차는 물론 다수 수입차 업체도 그간 신차 출시 전후로 외부로 알리던 내용이다. 벤츠 전기차 차주가 속상해하는 건 국산 배터리를 쓰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고 후 소비자 불안을 외면한 탓이 더 크다.

모델별로 배터리 공급업체를 공개하고 무상점검을 약속했지만 소비자 반발은 여전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일부 차주를 중심으로 벤츠 코리아나 당국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민원을 넣어야 한다는 토로가 불거졌다.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일선 딜러도 수입사로부터 거짓 정보를 받아 잘못 알린 만큼 속여 판 정황이라고 주장한다. 배터리를 교체하거나 아예 환불해달라고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금껏 드러난 정황만 본다면 불이 번져 피해가 커진 건 초기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탓이 크다. 내연기관차에서 불이 났더라도 마찬가지로 크게 피해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벤츠 차주를 비롯해 시민 다수는 화재 원인을 추궁하는 게 아니다. 사고 후 대응 과정에서 보여준 처사를 두고 아쉬움을 표한다.

이번 화재로 시민 다수가 느끼는 공포감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반면 벤츠 차주가 겪는 불편함은 현실적이다. 공동주택에 산다면 눈칫밥을 먹어야 하고 드센 이웃이 있다면 내 집 앞에 주차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중고차 값은 하염없이 떨어졌다. 집을 제외하곤 첫 번째, 두 번째 수준의 자산일 텐데 의도치 않게 쪼그라들었다. 고객을 소중히 여긴다는 게 단순히 입으로만 외치는 레토릭이 아니라면 배터리 수급처라도 알려달라, 내 차가 문제의 배터리를 쓴 모델인지 알려달라 식의 최소한의 고객 요청은 곧바로 응했어야 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인류 첫 내연기관을 만든 회사로 유명하다. 자동차 본고장 독일에서도 브랜드 가치로는 첫손에 꼽힌다. 우리나라가 자동차 시장을 개방한 후 공식적으로 처음 들어온 수입차도 벤츠였다. 당시 벤츠를 수입해온 한성자동차는 현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의 지분 절반 가까이 가진 주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만 40년 가까이 사업을 한 만큼 한국이 어떤 시장인지, 소비자 성향이 어떤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전동화·지능화가 얽히고설킨 자동차 산업 격변기로 꼽힌다. 전기로 가는 차, 스스로 가는 차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상황에서 유서 깊은 자동차 메이커가 보여준 행보에 아쉬움을 표하는 이가 적지 않은 건 반대로 그만큼 이 브랜드에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주주가 중국 자본이라고는 해도 주요 개발과정이나 의사결정은 독일 본사에서 하면서 멋들어진 차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외면한 셈이다. 100년 넘게 업력을 쌓으며 다져온 브랜드 가치가 한순간의 잘못된 대처로 허물어질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산업IT부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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