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타그램] 기억되고 싶은 기대

경이로운 영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에서 전향한 ‘워 보이(war boy)’ 눅스(니콜라스 홀트)가 막판에 적과 함께 산화하기 직전 임모탄의 아내인 정든 여인에게 "나를 기억해줘!"라고 간절한 얼굴로 말한다. 영화 초반에도 어느 워 보이가 적을 향해 몸을 던지기 전에 "내 용맹을 기억하라"고 하면 다른 워 보이들이 "기억할게"라고 화답한다. 기억의 약속이 마지막 응원이었고 목숨보다 오래 가는 것이 타인의 기억이라는 의식이 그들에게 있었다.

물론, 이건 제작자의 세계관이다. 영화에서는 악당의 자아 같은 게 잘 그려지지 않기 마련이지만, 현실 세계에서 사건이나 관계 속에서 소비되는 타인들에게도 자아가 있고 자신의 오랜 삶이 있다. 그 자아의 절대적 한순간에 누구에게든 기억되고 싶은 바람이란 당연해 보인다. 영화에서 "기억해줘"와 "기억할게"로 끝나는 관계는 무수하지만 대개 주목받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것이란 사실을 나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지금이라는 고비를 넘기는 데 얼마간 힘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매드맥스’ 최신편 ‘퓨리오사’에는 워 보이들의 “기억해줘”와 “기억할게”가 풍년이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폭탄과 불바다 속으로 몸을 날리는 워 보이들의 장렬한 최후들. 결국 모두 산화하고 기억해줄 워 보이도 없어졌고 기억해주겠다는 약속도 허공으로 사라졌다. 기대는 기대로서 역할을 다했을 뿐이다.

비달 대위와 오필리아 ['판의 미로' 스틸 컷]

영화 '판의 미로'에서 오필리아를 쏜 계부 비달 대위가 "내 아들에게 내가 죽은 날을 알려주라"고 유언하지만, 그를 응징한 동네 사람들은 "네 아이는 네 이름조차 모르고 자랄 것이다"라고 말한다. 삶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면 무의미할 수 있지만, 아들의 기림 속에서 연속된 삶을 살고 싶었던 기대라면 달라진다.

워 보이 눅스(왼쪽)와 퓨리오사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스틸 컷]

사람들의 말은 그마저 밟아버리는 형벌이었다. 인간에게는 죽음을 넘어서는 형벌이 있을 수도 있다. 반대로 내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누군가에 의해 나는 기억될 것이고 기려질 것이라는 기대는 마지막 이후에도 뭔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고, 그 마지막을 견디는 위안 정도 될 것이다.

호랑이와 달리 사람은 죽어서 이름은 물론, 사진까지 남긴다. 기억의 방아쇠로서 사진은 시간과 관계의 이정표다. 사진 찍는 일은 지금 보여주고 싶은 욕구와 아울러 미래에도 기억되고 싶은 기대다.

사진팀 허영한 기자 youngha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