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기자
지난해 8월 20대 운전자 신모씨(28)가 서울 강남구 압구정역 인근 도로에서 롤스로이스 차량을 운전하다 인도로 돌진해 20대 여성을 다치게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신씨는 사고 당일 성형외과에서 수면마취제인 '미다졸람' 등 향정신성 의약품을 투약한 뒤 운전대를 잡은 것으로 조사됐다. 미다졸람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지정한 의료용 마약류 중 최면진정제 계열에 속한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최근 의료용 마약류를 투약 또는 복용한 상태에서 운전하다 교통사고를 내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현행 도로교통법상 의료용 마약류 투약 시 운전을 몇시간 정도 규제해야 하는지 기준이 마련돼있지 않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일 민주당 서영교 의원실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약물 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건수는 총 386건으로 집계됐다. 2019년 57건에 불과했던 취소 건수는 2021년 83건으로 증가했으며 지난해는 113건을 기록했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향정신성의약품 등 약물의 영향으로 운전을 하지 못할 상태일 경우에는 운전대를 잡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약물 투약 후 몇시간 정도 운전을 금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이 없다.
별도의 기준이 없다 보니 투약자가 약효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는 사례가 발생한다. 실제로 2022년 광주 북구에서는 30대 운전자 A씨가 향정신성의약품인 졸피뎀이 함유된 수면제 1정을 복용한 상태에 1차선 도로를 주행하다가 맞은편 차를 들이받은 사고가 발생했다. A씨는 사고 직후 몸을 가누지 못하던 상태였으나 향후 법정에서 수면제를 복용했으나 정상적인 운전이 가능한 상태였다고 항변했다.
이외에도 지난해 3월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20대 여성 B씨가 이른바 '나비약'으로 불리는 향정신성의약품 식욕억제제를 과다 복용한 상태에서 자가용을 몰다가 차량 6대를 추돌한 사고도 발생했다.
해외 국가의 경우 이 같은 사태를 우려해 도로교통 법규에 향정신성의약품 투약 후 운전 가능 시간을 명시하고 있다. 약효가 체내에 잔류할 경우 도로 주행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예컨대 영국과 독일은 약물 투약 후 24시간 동안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호주는 약물 투약 후 12시간 동안 운전대를 잡을 수 없으며 프랑스는 약물 투약 당일에는 운전을 금지한다.
전문가는 약물 투약 후 운전을 금지해야 하는 수준을 결정하기 위해 약물 농도 기준과 약효 잔류 시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범진 마약퇴치연구소장은 "합법적으로 처방받은 의료용 마약류는 기존 불법 마약처럼 투약 후 운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며 "의료용 마약류에 초점을 맞춘 운전 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약물은 개체별로 약효에 차이가 크기에 모든 약물에 일괄적으로 같은 규정을 적용하기 어렵다"며 "특정 약물 검출 시 어느 정도 농도에 따라 처벌 수위를 달리할지, 운전 금지 시간은 어느 정도로 결정할지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