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윤동주는 왜 만주에서 태어나 만주에 묻혔을까?

지난 1월 작고한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1933~2023) 일본 와세다대학 명예교수는 한국문학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다. 최근 오무라 교수의 유족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한국문학 관련 자료 2만여점을 서울 은평구 국립한국문학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오무라 교수는 일본에서 대표적인 윤동주 연구가로 손꼽힌다. '세계인문여행' 4월29일자에서 나는 일본인의 ‘윤동주 사랑’에 대해 쓰면서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 のり子)와 이부키 고(伊吹鄕)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다. 오무라 교수가 이바라기 노리코·이부키 고, 두 사람과 다른 점은 윤동주를 학문적으로 파고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윤동주 자필시고집’을 비롯해 윤동주 관련 논문과 책을 10편 넘게 써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사실은 그가 1985년 중국 연변 자치주 룽징(龍井)에 방치되었던 윤동주 묘지를 찾아냈다는 점이다.

2022년의 오무라 마스오 교수.

윤동주는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졌다. 이 소식이 전보로 용정 집에 전달되자 아버지 윤영석은 후쿠오카로 가서 아들의 유골을 수습해 용정으로 돌아온다.

윤영석은 어떻게 용정에서 후쿠오카까지 갔을까. 지금처럼 비행기로 서너 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지도를 보면 그 여정이 아득하기만 하다. 이 노정은 일본으로 유학 간 윤동주가 오갔던 길이기도 하다.

당시 용정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은 두만강 변의 조선 땅 상삼봉(上三峯) 역. 함경북도 종성군의 작은 읍이 상삼봉이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두만강을 따라 삼봉, 상삼봉, 하삼봉 등의 마을이 들어섰다. 상삼봉 역은 원산에서 출발하는 함경선의 종점. 아버지는 아들의 유학길을 따라 함경선에 올라 원산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원산에서 경성으로 가는 열차 경원선으로 바꿔탔다.(1915년에 개통된 경원선은 정주영이 고향 통천에서 경성으로 두 번 가출할 때 탔던 기차다) 서울역에서 다시 경부선으로 갈아탄다. 지금처럼 새마을호나 KTX가 있던 시절이 아니다. 함경선, 경원선, 경부선은 비둘기호와 같은 완행열차였다. 부산역에 내려 부관(釜關) 페리에 승선, 밤새 현해탄을 건너 다음날 새벽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유해를 담은 나무상자를 가슴에 품고 현해탄을 건넜다. 다시 온 길을 뒤집어 경부선-경원선-함경선을 이용해 상삼봉 역에 내렸다. 족히 사나흘은 걸렸다. 어머니 김용, 동생 혜원·일주·광주 등 가족은 집에서 이백리나 떨어진 상삼봉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곳에서부터 유해는 아버지 품에서 내가 받아 모시고 긴긴 두만강 다리를 건넜다. 2월 말의 몹시 춥고 흐린 날, 두만강 다리는 어찌도 그리 길어 보이던지. 다들 묵묵히 각자의 울분을 달래면서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것은 동주 형에게는 사랑하던 조국을 마지막으로 하직하던 교량이었다.”(‘윤동주의 생애’ 윤일주)

장례식은 눈보라 휘몰아치던 3월6일 집 마당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땅이 풀린 5월 단옷날에 아버지는 아들 묘 앞에 비석을 세웠다. 윤영석은 1946년 2월16일 아들을 장가보내는 것처럼 동주의 일주기를 성대하게 치렀다. 그 직후 윤영석은 열아홉살 일주를 해방된 조국의 서울로 내려보낸다.(세계인문여행 2023년 8월19일자 참조)

1985년 오무라 교수는 만주 용정으로 가 윤동주 묘를 찾아냈다. 그리고 윤동주 묘에 참배했다. 윤동주가 눈을 감은 지 정확히 40년 만이었다. 1985년은 한중수교 이전이라 한국인은 중국 방문을 감히 생각지도 못할 때다.

최근 중국이 폐쇄한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 [사진 제공= 연합뉴스]

중국은 수교 이후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를 찾는 여행객이 늘어나자 생가 앞에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기념석을 세워놓았다. 이후 명동촌은 한국 여행객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지난여름 중국은 느닷없이 윤동주 생가를 폐쇄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생을 받았다. 1910년 혼인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은 첫 아이를 잃고 한동안 태기(胎氣)가 없다가 늦게 얻은 자식이 동주다. 부부는 그 뒤로 1녀2남을 더 둔다.

윤영석은 부친 윤하현을 모시고 살았다. 동주가 태어나면서 윤하현 집에서 3대가 살게 되었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윤영석의 여동생(윤신영)이 송창희와 결혼해 잠깐 한집에서 살았다. 이 부부가 1917년 9월 아들 송몽규를 출산한다.

우리는 오랜 세월 두만강 건너편 만주 땅을 간도(間島)라고 칭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척박한 지역이 함경북도다. 농사를 지을 평야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함경북도 사람들은 대대로 궁핍했다. 가난에 찌든 이들은 두만강 건너 비옥한 땅을 선망했다.

만주는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의 뿌리. 청(淸)은 만주 땅을 신성시해 외국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조선은 그런 청을 의식해 조선인이 두만강을 건너는 것을 금하고, 월강죄(越江罪)로 다스렸다. 그러나 어떤 법령도 배고픔을 이길 수는 없는 법. 함북 사람들은 꾀를 냈다. ‘강 중간에 있는 섬(間島)'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만주 땅으로 들어갔다. 청의 행정력이 느슨해진 틈을 이용해 조선인들이 대거 강을 건너 만주에 터를 잡았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불법 이주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인 마을이 만들어졌다.(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시원이다.)

윤영석의 조부도 조선 말기에 함북에서 북간도로 이주했다. 조부는 백태(白太) 농사를 지었고, 근면함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를 축적했다. 윤하현 대에 이르러 윤씨 집안은 명동촌의 유지로 자리 잡는다.

1909년 이전까지 명동촌 사람들은 유교 관습에 충실했다. 이러던 것이 1909년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모든 게 달라진다. 여성들이 자기 이름을 갖게 되었고, 예수를 믿는다는 뜻으로 이름에 믿을 ‘신(信)'을 넣었다. 윤동주가 태어난 1917년 명동촌은 기독교 마을이 되었다. 윤동주 역시 유아세례를 받았다. 주일마다 200명 이상이 교회에 모여 찬송가를 불렀다.

윤동주가 태어난 1917년의 만주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자.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만주는 유럽의 곡창이었다. 유럽 각국이 만주산 백태를 소비했다. 윤동주가 태어나기 2개월 전 볼셰비키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유라시아 대륙이 서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서서히 동진(東進)하며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적계(赤系) 러시아에 반대하는 백계(白系) 러시아인과 체코군단은 볼셰비키와 전투를 벌이며 동쪽으로 이동했다.

명동촌·용정을 중심으로 한 북간도가 무장 독립운동의 거점이 된 것은 1919년 3·1운동 이후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10월 청산리전투가 그 정점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국선을 기다리던 체코군으로부터 신식 무기를 헐값에 사들인 독립군은 정규군인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격을 당한 일본은 만주의 조선인을 탄압했고 무장 독립군 소탕 작전을 전개한다. 간도가 일본군 수중에 들어가면서 무장 독립군 대부분이 러시아 땅인 스보보드니(일명 자유시)로 피신한다. 1921년 6월, 무장 독립군은 자유시(市)에서 무장해제와 함께 몰살당한다.

1929년 북간도에 공산주의가 들어왔다. 소련 자유시에서 공산당이 된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한 결과다. 윤동주의 고모부(송창희)가 공산당으로 변해 인민학교 설립을 추진했고, 송몽규도 그런 아버지를 거들었다.

명동촌에서 유지로 살던 윤씨 집안은 왜 명동촌을 떠나기로 했을까. 공산당의 만행과 테러에 신물 나서다. 1931년 가을 윤씨 집안은 재산을 정리해 조선인이 많이 사는 용정으로 이사한다.

1932년 일본은 괴뢰 정부인 만주국을 세운다. 만주의 지배권은 법적으로 청·중화민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 용정의 광명 중학에서는 일본어로만 강의를 했고 윤동주는 영어, 조선어, 만주어, 일본어를 배우며 시인의 꿈을 키운다. 그리고 1938년 꿈에 그리던 연희전문 문과에 합격한다.

나는 1990년 회사 연수프로그램으로 열흘간 장춘-연길-백두산-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에 용정 땅을 밟아보았다. 그때의 감흥은 지금껏 생생하다.

중국이 윤동주를 가리켜 ‘조선족 애국 시인’라고 표기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중국 내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 시인이 맞다. 그런데 한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가를 폐쇄했다. 조선족 시인의 생가를 왜 문 닫나. 중국은 덩치만 컸지 하는 행동은 참으로 좀스럽고 시시한 소인배다.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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