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범수산업 매니징에디터
임주형기자
"2008년 이후 처음으로 경유 가격이 휘발유 가격을 추월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유럽 내 에너지 위기가 심화하면서 경유와 휘발유 가격이 약 14년 만에 역전됐다. 유럽 소비자의 수요가 경유로 몰리면서 글로벌 품귀 현상을 빚은 탓이다. 그런데 경유나 휘발유 등 '기름'은 모두 동일한 석유에서 파생된 제품이다. 어째서 똑같은 원자재에서 나온 기름의 가격, 쓰임새가 판이한 걸까.
흔히 우리는 석유를 '연료'로 생각하지만, 지하나 해저에서 갓 추출한 석유는 에너지원으로 쓰기에 매우 부적합하다. 지층에 묻혀 있던 황 등 불순물이 섞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람코, 엑손모빌, BP 등 글로벌 석유화학 기업들은 원유를 채굴 지대에서 뽑아 올리는 시추 사업, 이를 상품으로 가공해 파는 화학 사업을 한꺼번에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자를 '업스트림', 후자를 '다운스트림'이라고 한다.
따라서 석유를 경유, 휘발유 등으로 정제하는 작업은 다운스트림에 속한다. 석유 정제 작업은 열을 이용한다. 이를 '분별증류'라고 하는데, 원유에 각기 다른 온도의 열을 가해 서로 다른 제품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때 원유의 끓는점에 따라 정제유의 성질이 달라진다.
섭씨 30도 이하의 열로 증류한 석유에선 액화석유가스(LPG)가 나온다. 30~140도로 가열하면 휘발유를 얻을 수 있으며, 140~180도에선 나프타가 만들어진다. 그 뒤로 등유(180~250도), 경유(250~350도), 중유(350도 이상) 순이다.
한편 석유 정제 작업을 마치고 남은 원유의 '잔여물'은 추가 공정을 통해 윤활유나 아스팔트를 만든다. 말 그대로 원유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현대 문명의 핵심 자재로 쓰이는 셈이다.
각 석유화학 제품 특성은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LPG(liquefied petroleum gas, 액화석유가스) 정제과정에서 생산된 기체에 포함된 탄화수소를 액화시킨 제품이기에 다른 제품과 비교해 열량이 낮다.
상온에서 쉽게 증발하는 휘발유(揮發油, gasoline)는 인화성이 높아 강한 폭발력을 지닌다. 연료의 폭발력으로 피스톤을 움직이는 가솔린 엔진에 적합하다. 이 때문에 휘발유는 자동차, 항공기 공업용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수요도 높다. 반면 경유(輕油, diesel)는 휘발유보다 휘발성은 낮지만 열효율이 뛰어나 디젤 엔진 연료로 이상적이다. 등유(燈油, kerosene)는 다른 연료에 비해 그을음·소음을 덜 유발하기에 가정용 난로를 데우는 데 쓰인다.
연료마다 특성이 다르다 보니 상황에 따른 수요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국가 정책 혹은 수출입 상황에 따라 특정 연료 가격의 추이가 다른 연료와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국내에선 승용차 연료로 가장 흔히 쓰이는 휘발유보다 경유에 더 낮은 유류세를 책정해 왔다. 경유는 디젤차뿐만 아니라 선박, 발전기, 굴착기, 군수 장비 등에도 폭넓게 쓰이기 때문에 국가 경제에 더욱 중요한 연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십수년 동안 국내 경유 가격은 휘발유보다 더 저렴했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난 3월 이후 국제 경유 가격이 급격히 치솟으면서 한국에서도 '가격 역전' 현상이 벌어졌다. 한국석유공사 집계 국내 석유 제품 가격 동향 자료를 보면, 11월 첫 2주간 휘발유 판매가격은 리터당 1659.6원으로 9주 연속 하락한 반면, 경유는 전주 대비 12.8원 오른 1884.5원을 기록했다. 경유 가격은 지난 6월 약 14년 만에 처음으로 휘발유 가격을 추월한 뒤 현재까지 계속 격차를 넓히고 있다.
유럽발(發) 에너지 수급 위기로 인해 국제 경유 가격이 높아진 게 원인으로 지목된다. 유럽연합(EU)은 전쟁 전 러시아산 경유에 전체 수요의 60%가량을 의존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전쟁 이후 서방의 대대적인 경제 제재가 추진되면서, 기존 수입량을 다른 나라에서 대체해야만 했다. 유럽 소비자가 유럽 외 시장에서 경유를 수입해 가니 갑작스럽게 수요가 폭증했고, 이에 따른 여파로 국내 경유 수입가도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이다.
신범수 산업 매니징에디터 answer@asiae.co.kr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