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근로복지공단, 산재 피해자 성추행한 동료 직원에게 구상 못 해'

고의의 가해 동료 근로자도 구상의 상대방 될 수 없어
산재보험법 제87조 1항의 '제3자' 의미 명확히 밝혀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직장 동료를 성추행해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게 한 가해자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의 구상권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동일한 사업주에 의해 고용된 동료 근로자는 사업주와 함께 재해를 당한 근로자와 산업재해보상보험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산재보험법상 구상의 상대방이 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고의의 범죄행위를 저지른 동료 근로자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 판결이다.

대법원 제3부(당시 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공단이 직장 동료를 성희롱·성추행한 가해자 윤모씨를 상대로 낸 구상금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4일 밝혔다.

재판부는 "원심은 동료 근로자의 가해행위가 사회적 비난가능성이 매우 큰 경우에는 동료 근로자가 궁극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한다는 이유 등을 들어 피고가 산재보험법 제87조 1항에서 정한 '제3자'에 포함된다고 판단했다"라며 "원심판결에는 산재보험법 제87조 1항에서 정한 제3자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모 센터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윤씨는 2013년 6월부터 2년여 동안 자신과 함께 근무하던 20대 부하 여직원 A씨에게 지속적인 성희롱 발언을 하고 성추행까지 저질러 2017년 9월 A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A씨가 사망한 뒤 윤씨는 강제추행죄로 기소돼 2019년 1월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같은 달 10월 항소심에서 벌금 1000만원으로 감형된 뒤 상고하지 않아 형이 확정됐다. 형사재판에서는 2015년 6월 전북 무주의 한 리조트 객실에서 A씨를 강제로 껴안은 추행 혐의와 같은 해 9월 회사 사무실에서 A씨의 엉덩이를 만진 추행 혐의 등 2건에 대해 유죄가 인정됐다.

한편 A씨의 유족은 'A씨의 죽음은 업무상 재해'라며 공단에 유족급여를 청구했고, 공단은 A씨의 유족에게 1억4490여만원의 유족급여와 1330여만원의 장의비 등 모두 1억5800여만원을 지급한 뒤 가해자인 윤씨를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재판에서 공단은 A씨에게 약 2년 3개월 동안 지속적인 성희롱과 성추행을 가해 사망이라는 재해를 낳게 한 가해자인 윤씨에 대해 A씨가 갖는 손해배상청구권을 공단이 대위(대신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산재보험법 제87조(제3자에 대한 구상권) 1항은 '공단은 제3자의 행위에 따른 재해로 보험급여를 지급한 경우에는 그 급여액의 한도 안에서 급여를 받은 사람의 제3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위(代位)한다'고 정하고 있다.

반면 윤씨는 ▲자신이 A씨에게 가한 성추행은 형사재판에서 인정된 2건뿐이며 지속적인 성희롱과 성추행을 가한 사실이 없고 ▲강제추행을 한 뒤 2년이나 지나서 일어난 A씨의 극단적인 선택과 자신의 행위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없어 불법행위 책임이 성립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앞서 1심과 2심 재판부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카카오톡 대화 내용과 통화 녹음 등 증거를 바탕으로 A씨에 대한 윤씨의 지속적인 성희롱 발언과 성추행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특히 A씨가 2015년 9월 16일 윤씨와의 통화를 녹음한 파일에는 A씨가 그동안 윤씨의 언행들이 자신에게는 성적 희롱으로 느껴져서 수치심과 혐오감이 들었다는 심정을 토로하고, 윤씨가 그 같은 사실들을 시인하며 사과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법원이 인정한 사실관계에 따르면 윤씨는 A씨에게 '남자친구와 어디까지 갔느냐', '첫 경험은 있느냐', '내가 자자고 하면 잘래', '니가 모르는 유부남의 테크닉이 있어'라고 말하는 등 성생활에 관해 여러 차례 부적절한 말을 했고, 성적인 접근과 구애를 하며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했다.

다만 윤씨가 A씨를 사망하게 할 의도로 그 같은 성희롱·성추행을 한 것은 아니었고, A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데에는 A씨의 성격 등 개인적인 소인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 윤씨의 책임을 50%로 제한했다. 결론적으로 1심과 2심은 A씨가 장차 얻을 수 있었던 수입의 상실분(일실수입) 5억4000여만원과 공단이 청구한 장례비 500만원의 각 절반을 합한 2억7000여만원에 대해 윤씨에게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A씨에 대한 윤씨의 불법행위가 성립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법원도 결론이 같았다.

문제는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동료 직원이 산업재해를 당했을 때 보험급여를 지급한 공단이 동료 가해 근로자에게 과연 구상을 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1심과 2심은 공단의 구상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앞서 대법원은 1986년 산재보험법 제87조 1항에 규정된 '제3자'에 대해 "구상권 행사의 상대방인 '제3자'란 재해 근로자와 산업재해보상보험관계가 없는 사람으로서 재해 근로자에 대해 불법행위 등으로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사람을 말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또 2004년 대법원은 "동료 근로자에 의한 가해행위로 다른 근로자가 재해를 입어 그 재해가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는 경우에 그러한 가해행위는 사업장이 갖는 하나의 위험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 위험이 현실화해 발생한 업무상 재해에 대해서는 근로복지공단이 궁극적인 보상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 산업재해보상보험의 사회보험적 또는 책임보험적 성격에 부합한다"라며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근로자가 동일한 사업주에 의해 고용된 동료 근로자의 행위로 인해 업무상의 재해를 입은 경우에 그 동료 근로자는 보험가입자인 사업주와 함께 직·간접적으로 재해 근로자와 산업재해보상보험관계를 가지는 사람으로서 산재보험법 제87조 1항에서 정한 '제3자'에서 제외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 같은 대법원 입장에 따르면 A씨와 같은 직장 동료였던 윤씨에 대한 공단의 구상권 행사가 부정돼야 했지만, 1심과 2심은 범죄행위와 같은 고의의 가행행위를 저지른 동료 근로자의 경우 피해자와 직·간접적으로 산업재해보상보험관계가 있다고 볼 수 없어 산재보험법 제87조 1항에 규정된 '제3자'에 포함되기 때문에 공단이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봤다.

앞선 대법원 사례는 같은 주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동료 직원이 시너를 이용해 페인트가 묻어 있는 화장실 바닥을 청소하다가 라이터로 시너가 뿌려져 있는 바닥에 불을 붙여 그 곳에 있던 동료 근로자에게 화상을 입힌 사안이었는데,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 사례에 적용된 법리를 고의로 범죄행위를 저지른 동료 근로자에게까지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본 것.

1심 재판부는 ▲A씨의 극단적인 선택은 직장 내 인간관계에 내재하는 위험이 현실화된 것으로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있지만, 윤씨의 가해행위는 강제추행죄 등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로 업무 관련성이 거의 없고, 그에 대한 사회적 비난가능성이 매우 큰 점 ▲만일 일률적으로 동료 근로자의 가해행위로 인해 업무상 재해가 있는 경우 그 동료 근로자가 제3자가 아니라고 봐 공단의 구상권을 제한할 경우 이 사건처럼 업무와는 무관하게 고의의 범죄행위를 한 자 또는 그 상속인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경제적 책임을 부담하지 않게 되는 반면, 공단과 보험료를 납부하는 보험가입자들이 고의의 범죄행위에 따른 경제적 책임을 분담하는 부당한 결과가 초래되는 점 ▲이 사건 사고와 같이 동료 근로자의 가해행위가 업무와의 관련성이 거의 없고 그로 인한 결과가 극히 중대하며 가해행위에 대한 사회적 비난가능성이 매우 큰 경우에는, 그 동료 근로자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궁극적인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사회 정의와 공평의 관념에 부합하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한편 윤씨는 자신이 A씨의 유족에게 지급한 1억3000만원의 형사합의금은 구상금에서 공제돼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이미 공단이 유족급여를 지급해 구상권이 먼저 성립한 이후에 이뤄진 합의를 근거로 지급된 합의금 때문에 구상 범위를 제한할 수 없다며 윤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산재보험법 제87조 1항에 규정된 '제3자'에 관한 하급심의 판단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동료 근로자에 의한 가해행위로 다른 근로자가 재해를 입어 그 재해가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는 경우에 그러한 가해행위는 사업장이 갖는 하나의 위험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 위험이 현실화해 발생한 업무상 재해에 대해서는 공단이 궁극적인 보상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 산업재해보상보험의 사회보험적 또는 책임보험적 성격에 부합한다"고 전제했다.

이어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근로자가 동일한 사업주에 의해 고용된 동료 근로자의 행위로 인해 업무상의 재해를 입은 경우에 그 동료 근로자는 보험가입자인 사업주와 함께 직·간접적으로 재해 근로자와 산업재해보상보험관계를 가지는 사람으로서 산재보험법 제87조 1항에서 정한 '제3자'에서 제외된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기존 대법원의 입장을 유지했다.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피고(윤씨)와 A씨는 모두 동일한 사업주에 의해 고용된 동료 근로자인데, 피고의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등 불법행위로 A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됐고, 원고(공단)는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A씨의 유족에게 산재보험법에 따른 보험급여를 지급한 사실을 알 수 있다"라며 "이러한 사실관계를 위에서 본 법리에 비춰 살펴보면, 피고는 보험가입자인 사업주와 함께 직·간접적으로 재해 근로자인 A씨와 산업재해보상보험관계를 가지는 사람으로서 산재보험법 제87조 1항에서 정한 '제3자'에서 제외되므로,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위행사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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