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민기자
반지하와 세상을 연결하는 방범창. 외부에 노출된 그곳은 가정의 평안을 위협한다. 누군가 몰래 엿보지는 않을지. 그걸 뜯고 집안으로 침입하지는 않을지. 걱정과 불안의 주범이다. 그래서 방범창을 꼼꼼히 살핀다. 볼트를 조인다. 더 단단히.
튼튼한 방범창은 외부 침입을 막아준다. 하지만 안에서의 탈출도 어렵게 한다. 그렇다고 방범창을 허술하게 관리할 수 있겠는가. ‘반지하의 역설’은 우리의 현실이다.
곰팡내 가득한 그곳엔 오늘도 하루의 지친 몸을 달래려 몸을 누이는 우리 이웃이 살고 있다. 그들은 일상의 위험에 놓여 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는 불행이 그들 곁을 맴돌고 있다. 언제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지난 8일 밤. 서울 관악구 신림동 빌라의 반지하. 그곳에 세 명의 여성이 있었다. 40대 자매와 10대 여성. 그중 한 명은 지적장애인이다. 하늘을 찢을 듯이 퍼붓던 빗물이 1층에서 지하 계단을 타고 현관 쪽으로 밀려들었다. 육중한 수압 때문에 안에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남은 탈출구는 방범창.
세 명의 여성은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방범창을 뚫고 나갈 수는 없었다. 주민들이 나섰지만, 밖에서 방범창을 뜯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발만 동동 구르며 절규하던 그날 밤은 모두에게 악몽이었다.
끔찍했던 8월의 기억을 뒤로한 채 9월이 시작된다. 우리는 또 망각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뿌연 흙탕물로 오염된 공간을 단장해도 절규의 시간은 가려지지 않는다.
그날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대중의 관심이 증폭되자 단선적인 해법이 나왔을 뿐이다. 반지하라는 주거 공간을 없애겠다고 한다. 반지하를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단지 비용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 인근 반지하에 사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서민의 오전 일과는 일찍 시작된다. 새벽부터 일터로 나가려면 교통편이 중요하다. 대중교통이 편리한 역세권. 자녀가 있는 가족도 거주할 수 있는 2~3개의 방. 그러면서 거주 비용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서민들의 선택지에서 반지하는 거의 유일한 대안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반지하를 나오면 어디로 갈 수 있겠는가. 개선된 주거 여건과 저렴한 가격의 도심 주택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다면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급한 불만 끄면 된다는 생각으로 반지하 거주자 위주로 임대 주택을 배정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고시원, 쪽방 거주자와의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는 데다 원룸에서 거주하는 이가 많은 젊은 세대로부터 기회의 공정을 둘러싼 반발을 부를 선택이다.
곰팡내 가득한 공간에서 사는 게 힘겹다는 것은 알지만 쉽게 반지하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헤아리는 게 순서다. 문제의 본질은 결국 양극화의 그늘과 맞닿아 있다.
여성 세 명이 극한의 공포를 경험하며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그들의 영혼이라도 위로해주려면 땜질 처방이 아니라 본질에 천착해야 한다. 그것이 ‘반지하의 역설’에 다가서는 최소한의 예의 아니겠는가.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