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그날엔…] 한나라당 패배의 굴욕감만 더해준 대선 재검표 소동

한나라당, 2002년 대선 '당선무효소송' 제기했다가 대국민 사과…"겸허하게 대선결과 수용한다"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가 치뤄진 15일 서울 영등포구 다목적배드민턴체육관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관계자들이 개표 작업을 하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선거는 이기는 것만큼이나 ‘잘 지는 것’도 중요하다. 정당이나 정치인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민심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로 비칠 수 있다. 주요 선거 때마다 ‘개표 조작설’이 거론되지만 실제로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하는 행위는 또 다른 문제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경우 패배의 충격은 물론이고 무책임한 정치라는 비판을 자초할 수 있다.

제21대 총선을 놓고 ‘사전투표 조작설’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보수 유튜버의 주장에 미래통합당 일부 의원들이 힘을 실어주면서 논란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개표 조작에 개입했다는 가정은 선거의 메커니즘을 아는 사람이라면 동의하기 어렵다.

미래통합당 쪽에서도 자제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거 패배를 쉽게 납득하기 어렵더라도 결과를 부정하는 모습은 당의 미래를 고려할 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가 치뤄진 15일 서울 영등포구 다목적배드민턴체육관에 마련된 개표소에 투표함이 도착하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총선도 이렇게 민감한데 대선은 어떨까. 특히 당선을 자신했는데 결과는 패배로 나왔다면 그 상실감은 말로 표한하기 어렵다. 대선후보 본인은 물론이고 정당과 그 지지층에 이르기까지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정치적인 리스크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대선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 재기의 길을 모색해야 할 때 ‘엉뚱한 고집’으로 국론 분열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면하기 어렵다.

2002년 대선을 둘러싼 재검표 소동이 바로 그런 경우다. 2002년 12월19일 제16대 대선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맞대결로 진행됐다. 한나라당은 당선을 자신했지만 최종 개표 결과는 노무현 후보 1201만4277표(48.9%), 이회창 후보 1144만3297표(46.6%)로 집계됐다. 노무현 후보가 57만980표 차이로 승리했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대선 결과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이어졌다. 당시에도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자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재검표를 요구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한나라당은 대선 5일 후인 2002년 12월24일 “대선과정에서 각종 의혹이 제기되고 있어 재검표가 불가피하다”며 당선무효소송을 대법원에 냈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가 치뤄진 15일 서울 영등포구 다목적배드민턴체육관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관계자들이 개표 작업을 하고 있다./김현민 기자 kimhyun81@

대통령 당선이 무효가 된다면 여파는 상상 그 이상이다. 법원의 판단에 정치권 안팎의 관심이 집중된 이유다. 당선무효소송은 정치 불안의 불씨를 증폭시켰다. 한편에서는 한나라당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선택지에 손을 댔다는 평가도 나왔다. 대선패배의 굴욕감을 더해줄 자충수라는 지적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대법원은 전국 35개 법원을 통해 1104만여장의 투표용지에 대한 재검표를 진행했다. 2003년 1월18일 재검표 집계 결과 이회창 후보 득표수는 애초 집계보다 135표 늘어났다.

노무현 후보 득표는 785표 줄었다. 노무현 후보 득표가 줄어든 것은 재검표에서 판정보류표로 분류된 게 원인이어서 실제 감소분과는 차이가 있다는 게 중앙선관위의 설명이었다.

자료사진 /문호남 기자 munonam@

판정 보류표는 197표로 집계됐다. 판정 보류표가 이회창 후보의 표로 결론이 나더라도 변화된 수치는 1117표 수준이다. 57만980표 차이의 격차로 승패가 갈린 것을 고려한다면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치다.

한나라당은 재검표 이후 “두 번 망신을 당했다”면서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는 “겸허하게 대선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며, 일부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국민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대법원 재검표 결과와 관련해 당선무효소송 취하 등 후속조치를 취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2002년 대선은 재검표 소동으로 이어졌지만 결과를 뒤집기는커녕 망신만 자초했다. 더욱 문제는 정치사에 불명예 기록을 남겼다는 점이다.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은 정당이라는 지적은 한나라당 역사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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