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곤기자
지난해 6월1일 오전 10시32분께 충북 청주시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제주동부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살인 등 혐의로 긴급체포되는 고유정의 모습.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펜션의 거실과 다이닝룸, 거실과 맞붙어있는 욕실의 벽면과 천장 등에서 혈흔이 발견됐으며 특히 다이닝룸에서 많은 혈흔이 나왔다."
'제주 전 남편 살해사건'을 수사한 제주동부경찰서는 지난해 5월31일 범행장소인 제주시 한 펜션에서 루미놀 검사를 한 결과 혈흔(血痕)이 발견되자, 다음달 4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과 혈흔 형태 분석 전문가들을 투입해 현장을 조사했다.
이날 한 벽면에서 발견된 혈흔은 고유정(37)이 전 남편 A(당시 36세)씨를 최초 가해한 후 최종적으로 시신을 가져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까지 높이 150㎝에서 점점 낮아지는 형태를 보였다.
이 혈흔 흔적은 지난해 11월4일 열린 6차 공판서 증거로 제출됐다. 국과수 분석결과 고유정은 다이닝룸 9번, 주방 5번, 현관 3번 등 3곳에서 15차례 피해자를 흉기로 찔렀다.
현장에 뿌려진 혈흔의 크기와 형태, 위치 등을 종합하면 정황상 피해자가 수면제를 먹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서 기습을 당해 현관으로 달아났고, 고유정은 그런 피해자를 쫓아가며 계속 흉기를 휘두른 것으로 수사당국은 보고 있다.
앞서 고유정 측은 전 남편이 성폭행하려 해 우발적으로 한 차례 찔렀다고 진술했지만, 범행현장서 발견된 혈흔이 이런 고유정의 주장을 뒤집은 것이다.
전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고유정(36)이 제주동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와 진술녹화실로 이동하고 있다.사진은 지난해 6월.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정지이탈흔도 증거가 됐다. 정지이탈흔은 흉기에 혈흔이 묻어 있는 상황에서 사람을 찌르고 뺄 때 흉기에 묻은 피가 밖으로 튕겨 나가는 현상이다.
앞서 경찰은 피해자가 움직인 흔적이 있지만, 일시적으로 반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공격을 당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이어갔다.
검찰은 "혈흔의 형태가 피해자를 우발적으로 찔렀다는 피고인의 주장과 명백히 배치된다"며 고유정 측 주장을 반박했다. 고유정은 피해자가 성폭행하려 해 펜션의 가장 안쪽 다이닝룸에서 흉기로 한 번 찌른 뒤 현관으로 달아났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지난달 20일 결심공판에서 고유정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오늘(10일) 열리는 선고 전 마지막 공판에서 고유정은 최후 진술을 한다.
◆ 범행 현장에 있는 '혈흔'…흉기 어떻게 휘둘렀는지까지 분석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는 혈흔은 증거 이상의 많은 것을 말해준다. 당장 혈흔을 만들어 낸 피해자, 용의자 등 이들의 행위를 추정할 수 있다.
프로파일러·과학수사 경찰 등에 따르면 혈흔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먼저 '날아가서 형성된 혈흔'인 비산 그룹에 속하는 혈흔과 '날아가지 않은 혈흔'은 비비산 혈흔이다.
혈액은 일정 시간 동안 공기 중을 비행하면 동그란 공 모양을 유지한다. 이런 형태의 혈흔이 직각으로 어떤 물체와 만나면 정원(正圓)에 가까운 혈흔이 된다. 90도 이하 각도를 가지면, 각도가 작아질수록 좁고 긴 모양의 타원형 혈흔이 된다.
이런 혈흔은 혈액이 날아와서 사물과 부딪치며 표면장력이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이 혈액 방울에서 혈액 양이 밀려오다가 운동 방향으로 2차 혈흔을 튄다. 이 혈흔이 퍼져 나간 쪽이 발혈점(혈흔의 출발 지점)의 반대 방향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가격하는 순간에 상처가 생기면서 흉기 등과의 충격으로 인해 혈액이 날아갈 수 있는데, 이런 것을 '충격 비산 혈흔'이라 말한다.
이 혈흔으로 범인의 공격 행동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현장에서 많이 관찰되는 혈흔 중 용의자가 휘두른 흉기와 모양과 형태 등을 추정할 수 있는 혈흔이 있는데, 이는 '이탈 혈흔'이다.
어떤 행위에 의해 혈액이 묻어 있는 흉기를 휘두르는 과정에서 굉장한 충격이나 급격한 휘두름, 또는 멈춤 동작을 할 때 관성에 의해 흉기로부터 이탈한 혈액들이 만들어 내는 혈흔을 말한다.
국과수에 따르면 혈흔의 형태는 사건 현장에서 혈흔의 여러 가지 특징을 분석함으로써 다양한 추정이 가능하다. 예컨대 범인과 피해자가 사건 당시 매우 심하게 다투었을 경우 범인도 피를 흘렸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 비산된 혈흔 가운데 자유낙하 혈흔(정지된 상태서 중력의 힘에 의해 떨어진 혈흔)이 발견되거나 다른 혈흔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비산된 혈흔이 있다면 이는 범인이 흘린 혈흔일 수 있다.
그러나 사건현장에서 일정한 패턴의 혈흔을 발견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범인이 혈흔을 인위적으로 문지르거나 혈흔과 닦인 혈흔, 또 피 묻은 물건이 다른 사물과 접촉하면서 혈흔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태원 살인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된 미국인 아더 존 패터슨이 지난 2015년 9월23일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국내로 송환돼 취재진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 혈흔 분석으로 밝혀진 진실…'이태원 살인사건'
살해사건에서 혈흔이 중요한 역할을 한 사건은 '이태원 살인사건'이다. 당시 사건현장에서 발견 분석한 혈흔은 1997년 사건 발생 이후 19년 만에 진범으로 드러난 아더 존 패터슨을 미국에서 데려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1997년 4월 서울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대학생 조중필(당시 23세)씨가 흉기에 수 차례 찔려 살해당한 사건이다.
그날 가게에 있던 재미동포 에드워드 리와 패터슨이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다. 항소심까지는 리가 범인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1998년 대법원은 증거 불충분으로 리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후 검찰은 패터슨을 진범으로 보고 재수사에 착수했으나 그는 이미 미국으로 떠난 뒤였다. 법무부는 패터슨 소재를 파악해 미국 측에 범죄인 인도를 청구했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혈흔 형태 분석'이라는 새로운 수사기법이 도입됐다. 검찰은 경찰청에 의뢰해 당시 범행현장 사진과 수사기록을 제공하고 혈흔 형태 분석을 의뢰했다.
'이태원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미국인 아더 존 패터슨의 검증기일인 지난 2015년 12월4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별관에 당시 사건을 재현하기 위한 현장검증 세트장이 설치돼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 검찰, '선상분출혈흔' 등 혈흔 분석 토대로 패터슨 기소
경찰 등에 따르면 당시 조씨는 흉기에 찔려 목 동맥이 절단됐다. 이 때문에 피는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화장실 벽 1.4m 높이에는 많은 양의 혈액이 한꺼번에 분출된 '선상분출혈흔'이 남아 있었다. 동맥, 심장이 파열돼 혈액이 압력에 의해 분출될 때 생기는 혈흔이다.
조 씨가 소변을 보다가 오른쪽 목을 흉기에 찔렸고 왼쪽으로 몸을 돌리며 피하다 재차 공격을 받고 많은 양의 피를 쏟아 낸 것이다.
또 오른쪽 벽면에는 '이탈 혈흔'이 있었다. 피해자의 목을 찌른 흉기에서 떨어진 피로 추정할 수 있다. 왼쪽 벽면 세면대 주변에도 다량의 혈흔이 있었고, 피해자 신체 일부가 접촉하면서 생긴 '묻힌 혈흔'도 있었다.
이는 조 씨가 여러 차례 공격당하면서 몸부림 친 흔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국 이렇게 다량의 피가 분출했음을 고려하면 범인에게도 피가 많이 묻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추론은 사건 당시 패터슨이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뒤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증언과 일치하는 분석 결과였다. 패터슨 신발에도 피해자의 신체에서 떨어진 핏자국(낙하혈흔)이 선명했다.
검찰은 이를 토대로 2011년 12월 패터슨을 기소했다. 결국 패터슨은 2015년 9월 국내로 송환돼 법정에 서게 됐다.
1심과 2심은 패터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대법원도 2017년 1월 상고심에서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 없이 충분히 증명됐다"며 원심을 확정했다.
이처럼 혈흔형태 등을 분석해 증거화하는 과학수사기법은 2008년 국내에 도입됐다. 앞서 검찰은 '조씨에게 반항흔이 없는 만큼 그를 제압할 정도로 덩치가 큰 사람이 범인'이라며 키 180㎝에 몸무게 105㎏인 리를 살인혐의로 단독기소했다가 무죄 판결이 나 풀어줬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