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우기자
1896년 개최된 1회 아테네 올림픽 모습.(사진=https://www.olympic.org)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 남작이 근대 올림픽을 처음 구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국가주의의 고취에 있었다. 그는 보불전쟁(1870~1871)에서 패배한 조국 프랑스의 국민 사기 진작을 목표로 스포츠행사를 준비하다가 때마침 독일 고고학자 쿠르티우스가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 유적 발굴에 성공하면서 올림픽을 기획했다.1894년, 쿠베르탱의 노력으로 조직된 IOC는 1896년, 제 1회 아테네 올림픽을 개최하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그의 조국인 프랑스는 적국인 독일이 참가한다는 이유로 이름만 올리고 선수가 참가하진 않았다. 쿠베르탱 역시 이 일로 평생 프랑스에서 비난을 받다가 결국 IOC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 여생을 보냈다. 올림픽을 이후 계속 그리스에 개최할지, 전 세계 도시마다 돌아가며 개최할지를 두고서도 논란이 일다가 결국 각국 후원단들의 입김에 의해 전 세계 도시를 돌면서 개최되기로 규칙이 바뀌었다. 첫회부터 국가들끼리의 파워게임과 국제정치에 의해 좌우되는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2회 올림픽은 1900년 파리 올림픽은 아예 그해 열린 프랑스 만국박람회 부속행사로 열릴 정도로 정치적 종속도가 더욱 심했다. 올림픽이 만국박람회 일정에 맞춰 6개월로 늘어뜨려졌고, 종목도 분산개최됐으며 만국박람회 볼거리 공연들까지 대회 종목에 포함되는 등 엉망이 됐다. 볼거리 제공을 위해 열린 대포 발사 경기는 농가에 불을 질러 폐지됐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인명구조 경기는 정말 사람이 죽는 바람에 폐지되는 등 갖가지 수난을 겪었다.1936년, 나치 독일이 개최한 베를린 올림픽 모습. 가장 정치적으로 이용된 올림픽으로 기록됐다.(사진=위키피디아)
이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이르러 정치적 올림픽은 극에 달하게 됐다. 나치 독일 정권이 개최한 베를린 올림픽은 인종차별, 배타적 민족주의를 아예 명분에 세워두고 개최했으며 보이콧을 하려던 영국, 프랑스, 미국 등도 당시 험악한 독일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참가했다. 결국 2차대전 후 열린 런던올림픽에서는 역으로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2차대전 전범국가들은 발도 못딛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올림픽은 매우 강한 정치색을 띠게 됐다.냉전시기에는 흔히 '반쪽 올림픽'이라 불리는,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간 보이콧 전쟁에 올림픽이 희생되기도 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64개국이 불참했고, 4년 뒤인 LA올림픽에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14개 국가가 불참했다. 한편 중국과 같은 경우에는 중화민국의 올림픽 참가에 반발해 IOC를 한때 탈퇴, 1984년 LA올림픽 이전엔 아예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기도 했었다.이러한 냉전시기 극한 대치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풀어졌지만, 국내나 지역 정치문제와 올림픽이 연계되는 일은 계속됐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독립, 티벳 독립운동, 중국 인권문제 등 각종 정치적 이슈에 휘말리며 성화가 봉송하다 3번이나 꺼지는 사고를 겪기도 했고,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는 리우시에서 올림픽을 명분으로 빈민 7만7000여명을 강제 이주, 이 과정에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비난받기도 했다.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