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열기자
20세기 이데올로기 표지
자유주의나 보수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모두 20세기 이전부터 적지 않은 잉태기간을 거치며 우리 곁에 존재했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데스튀 드 트라시가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처음 쓸 때만 해도 관념(idea)에 대한 학문 정도의 의미였으나 이후 여러 함의가 덧붙여졌다."특정한 사회ㆍ문화집단에 적용할 수 있는 근본적인 신념의 상호연관체계"라는 중립적인 정의가 가능한 동시에 누구나 받아들이는 상식으로 볼 수도, 혹은 정치적 추진력과 관련된 권력에의 의지와 결부시켜 볼 수도 있다. 저자 역시 각 이데올로기의 지적토대를 살펴보면서도 각 시대상황과 연관시켜 실제 사람의 삶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책을 톺으면서 넷 중 하나인 파시즘에 유독 집중한 건 우리 사회가 처한 여건 때문이다. 군부정권 시절 폭력적인 국가권력을 빗댄 '파쇼'라는 표현이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횟수는 확연히 줄었지만, 파시즘은 과거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특수한 탈선의 상황으로 볼 수만은 없다고 나는 본다. 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일어날 상황이 보여주듯, 파시즘이란 이념은 일정한 원리와 신념을 기반으로 하기보다는 가변적이고 필요에 따라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과 변형이 쉽기 때문이다.이는 파시즘만의 특징이 아니다. 다른 이데올로기 역시 부침을 겪으면서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그리고 변형이 빈번하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위기에 몰린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와 결합하며 신자유주의로 거듭났다. 생존자로 남은 신자유주의 역시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 역시 21세기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20세기 말미 외환위기 이후 불안정한 상황이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우리나라도 신자유주의가 휘젓고 다닌 곳 중 하나다. 불안을 먹고 사는 파시즘이 구현될 여건이 갖춰져 있다는 뜻이다.물론 저자가 지적하듯 전후 파시스트라는 이름이 들어간 단체는 한곳도 없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는 이민자에 대한 반감과 편견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파시즘은 언제나 생명력을 유지해왔으며 시시때때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해방을 약속한다. 파시즘이 다른 이데올로기와 다른 게 있다면 해방의 과정에서 다소 거친 수단을 동원한다는 점이다.저자가 20세기를 비롯해 오늘날까지 가장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친 인물로 아돌프 히틀러를 꼽은 점도 눈에 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의 국제경제에 대한 지배력이 높아진 점은 물론 20세기 중반 이후 냉전체제가 남긴 유산, 나아가 아프리카나 중동, 아시아 전역에까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결과에 따라 근본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다. 톰슨은 "죽은 파시즘이 산 파시즘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됐다는 생각도 지나친 과장만은 아니다"고 강조했다.자유주의의 승리로 역사가 끝났다는 한 정치철학자의 단언이 도리어 이데올로기 논쟁에 불을 붙였듯,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관념체계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따지고 살펴보는 일은 소수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본다. 분단은 한반도에 터를 둔 모든 이의 현실이며, 자본과 계급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책이 다루는 주제가 묵직한 반면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설명이 간략한 부분은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