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책과 저자]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베를린 장벽까지

독일사 깊이 읽기 - 독일 민족 기억의 장소를 찾아서

독일사 깊이 읽기

“공간이란 인간의 자유와 실재성의 깊이의 차원과 관계한다. 자유는 공간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고, 공간은 존재의 실재성의 조건이 된다. 비판적 지리학의 견지에서, 공간이란 무엇보다 힘(권력)과 연계됨을 보여주고 있다. 즉, 공간의 힘과 인간의 운명은, 물리적 지역과 자연환경에서부터 지속되는 문화와 지역전통에 이르기까지 많은 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적 삶과 공간의 연관은 인간존재의 근본조건이다. 메를로-퐁티의 표현처럼, 우리의 신체는 공간 안에 있다고, 더욱이 시간 안에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공간과 시간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 그곳은 인간과 무관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무정한 사막 같은 공간이나 기계적 공간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이 실존하면서 뭇 존재자와 만남이 가능한 역동성·사건성·관계성·맥락성을 지닌 유정(有情)한 공간, 즉 의미로 충만한 살아 있는 공간이다.” 철학자 강학순(안양대학교 기독교문화학과 철학교수)은 2011년에 출간한 『존재와 공간』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전제이자 숙명으로서 공간에 대하여 힘차게 선언한다. 인간이 시간과 공간 안에 거주하는 한, 세계는 오롯이 역사의 그릇이 되어 그 안에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케 하는 의미의 생명수가 출렁이게 한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독일사학자 고유경(원광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이 『독일사 깊이 읽기』를 통하여 소환하는 독일의 오랜 역사는 ‘기억의 장소’라고 하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기에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공간의 담론이 된다. 그의 아름다운 필치는 독자를 숙고와 반추의 황홀경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다만 독자의 지식과 지성의 정도에 따라 감지하는 수심에 큰 편차가 있을 터인데, 어느 층위에서 고유경의 언어에 사로잡히든 큰 문제는 없다. 『독일사 깊이 읽기』는 ‘푸른역사’ 출판사가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시리즈 가운데 열세 번째로 펴낸 책으로 부제는 ‘독일 민족 기억의 장소를 찾아’이다. 고유경은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서 「교육에서 선전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슈투트가르트 노동자문화운동에서 아마추어 연극과 영화(Zwischen Bildung und Propaganda. Laientheater und Film der Stuttgarter Arbeiterkulturbewegung zur Zeit der Weimarer Republik)」를 써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의 제목은 매우 레인지가 큰 그의 학문 영역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19세기 후반 이래 근대성에 도전해온 소수자들의 노력에 집중되어 있다는데, 각별히 독일 근대 민족의식의 성립과 그 문화적 재현 양상에 주목해왔다고 한다. 그는 『독일사 깊이 읽기』에서 독일 정체성의 요람이 된 기억의 장소 아홉 곳을 ‘깊이’ 읽고자 시도한다. (출판사 책소개) 고유경은 ‘독일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 독일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피에르 노라가 쓴 『기억의 장소』의 문제의식으로 연결한다. ‘기억의 장소’의 관점은 정체성의 형성과 관련된 실재하는 공간을 문론 상징적 장소들인 시간, 인간, 이념, 상징 등을 포괄하기에 이른다. 고유경은 토이토부르크 숲과 키프하우젠 산, 독일 아이제나흐 남쪽에 있는 고성 바르트부르크, 포츠담과 라인강, 라이프치히와 랑에마르크, 그리고 바이마르와 베를린 장벽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토이토부르크 숲은 서기 9년 초가을 라인강 동쪽에서 로마군의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로마제국의 북쪽 판도를 라인강 서쪽으로 결정해버린 한 사나이에 대한 기억을 환기한다. 그는 게르만의 영웅 헤르만이며 라틴어로는 아르미니우스이다. 그는 위대한 레지스탕스로서 불굴의 독일 정신을 상징하는 첫 아이콘이니 패배하지 않은 베르킨게토릭스, 생포되지 않은 윌리엄 월러스이다. 키프하우젠 산은 붉은 수염을 휘날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예수를 연상시키는 죽음과 부활의 염원을 표상한다. 포츠담은 사라진 철혈의 왕국 프로이센과 연결되고 라인강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19세기 독일 민족주의의 구심점이다. 1813년의 라이프치히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즉 ‘해방전쟁’의 결정적 장면이며 랑에마르크는 1차 세계대전의 전장이다. 바이마르는 독일사의 명암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고 베를린 장벽에는 독일과 세계 현대사가 고스란히 아로새겨졌다. 바이마르를 다루는 고유경의 필치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가 보기에 바이마르는 ‘포츠담과 더불어 정신(Geist)이라는, 독일인에게는 자긍심과 연관된 단어와 결합된’ 도시이다. ‘바이마르 정신’은 독일 고전주의의 거장 괴테와 실러에 대한 기억과 연결되며 이에 대한 독일인의 자부심은 정파와 세대를 초월했다. 그러나 나치 독재는 이 정신의 도시에 부헨발트 수용소의 끔찍한 기억을 덧씌웠다. 1945년 4월 16일 바이마르의 시민 약 2000명은 에리히 클로스 시장의 인솔로 도시 북서쪽 10㎞ 거리에 있는 에터스베르크 산에 건설된 나치 강제수용소 부헨발트를 방문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타다 남은 뼈와 재들은 시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훗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임레 케르테스는 “그들은 아무 것도 몰랐다. 아무 것도,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고 썼다. 하지만 고유경은 묻는다. “바이마르 시민들은 과연 굳게 닫힌 수용소 철문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을 전혀 몰랐을까?” 고유경은 단단한 문장으로 정리해 나간다. “바이마르와 부헨발트, 독일사의 명암을 이토록 뚜렷하게 보여주는 장소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이름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부헨발트는 바이마르에서 출발한다. 휴머니즘과 야만, 민주주의와 독재, 세계적인 문화의 요람과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학살의 장소, 둘은 샴쌍둥이처럼 분리할 수 없다.” 그리고 강인한 삶의 의지로 수용소의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되새긴다.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그러나 책이 품고 있는 무한대의 공간을 내면에 수용하기 위해서는 오랜 되새김질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로마제국 시대로부터 베를린 봉쇄로 상징되는 동서 냉전 시대를 아우르고 그 위에 현대를 세웠기에 방대한 역사적 지식을 동원해야 저자가 구축한 담론의 세계에 입장할 수 있다. 전쟁사, 철학사, 종교사, 예술사, 인물사를 망라한 서술을 꼼꼼한 각주와 미주, 적절한 시각자료들이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텍스트와 주문, 사진 만으로 책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 그만큼 깊은 책이다. 독일이라는 국가 개념이 지니는 광대하고도 추상적인 일면과 강역을 단정하기 어려운 특징 때문에 독일사를 공부하는 길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종합적 이해에 도달하는 일은 긴 시간과 역사 주변 학문의 조력을 얻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누구나 경기장에 입장할 필요는 없다. 스타디움 안에는 선수도 있고 관중도 있다. 맘 편히 저자의 필치를 따라가기만 해도 맥락을 이해하고 독일 역사의 심연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고유경의 문장은 정직하고 차분하며 그럼으로써 정돈된 역사학자의 학식과 정신성을 드러낸다. <고유경 지음/푸른역사/1만8000원><ⓒ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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