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탄생 100주년]소 1001마리 몰고 '통일牛步'

⑤20세기 최고의 분단國 전위예술 소떼방북

[아시아경제 배경환 기자]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세계적인 미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기소르망은 1998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을 이렇게 표현했다. 당시 북한이 소떼가 판문점을 지나는 걸 반대한 탓에 한때 배로 보내는 방법까지 검토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당시 이 장면은 미국의 뉴스 전문 채널인 CNN에 생중계됐으며 외신들도 분단국가인 남북한의 휴전선이 개방됐다고 보도했다. 이리하여 1998년 6월과 10월, 정 회장은 두 차례에 걸쳐 각각 500마리, 501마리의 소를 이끌고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들어갔다. 첫 방북날 오전 임진각에서 정 회장은 "이번 방문이 남북간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소회를 전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8년 6월 16일 일부 수행원과 함께 소 500마리를 이끌고 북한으로 이동했다.<br /> <br />

◆"1마리의 소가 1000마리가 되기까지"= 정 명예회장은 실향민 출신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이룬 경영자로도 유명하다. 이는 정명예 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던 이유이기도 하다.정 명예회장은 17세때 현재 북한 지역인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의 고향집에서 부친이 소를 판돈 70원을 훔쳐 집을 나왔다. 정 명예회장이 소떼 방북을 기획한 것은 1992년부터다. 그는 자신의 서산농장에 소 150마리를 사준 뒤 방목을 지시했다고 한다. 소떼 방북당시 충남 서산시 부석면 창리 간척지에 조성된 현대서산농장 70만평의 초원에는 이미 3000여마리의 소들이 방목되고 있었다.정 명예회장은 총 두 번에 걸쳐 소 1001마리를 북한으로 이끌었다. 1000마리에 1마리를 더 추가한 것은 향후 지속적인 후원을 이어가겠다는 약속의 의미였다. 더욱이 정 명예회장의 지시로 암소 중 100여마리는 새끼를 밴 상태였다.1차분은 1998년 6월 16일 넘어갔다. 적십자사 마크를 단 흰색 트럭 수 십대에 실린 소들이 오전 9시 22분 판문점 북측지역을 먼저 넘었고 정 명예 회장은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지나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4개월 후 2차로 501마리의 소떼를 몰고 2차 방북이 이뤄졌다. 현대그룹은 소떼 방북을 위해 트럭과 사료를 포함해 41억7700만원의 비용을 부담했다. 2차 방북 시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정 명예회장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를 찾아 '깜짝 면담'이 이뤄지기도 했다. 밤 10시 25분쯤 정 명예회장이 묵고 있는 평양 백화원초대소에 나타난 김 위원장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이라며 "명예회장 선생께서 연로하시고 거동이 불편하셔서 직접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김 위원장이 김용순 아태위원장에게 9월 25일로 잡았던 금강산 관광이 기대보다 늦어진다고 말하자 김 아태위원장은 곧 실현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금강산관광 외에도 북한 연안에 대한 남북 공동석유시추작업 등 경협사업이 논의됐고 면담은 45분간 진행됐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8년 6월 16일 일부 수행원과 함께 소 500마리를 이끌고 북한으로 이동했다.<br /> <br />

◆10년의 기다림… 남북협력 개척자= 정 회장은 기업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남북협력 시대를 개척한 '민간 통일운동가'로도 평가된다. 금강산 관광개발사업 등 남북경협사업을 통해 분단 반세기 동안 축적된 남북의 대립과 긴장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서다.사실 정 명예회장이 한국 기업인으로서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이보다 앞선 1989년 1월이다. 당시 미 수교국인 구 소련을 방문해 미개척지인 대공산권 진출을 모색한 바로 직후였다.북한 노동당 서열 4위인 허담의 초청으로 방북길에 나섰던 정 명예회장은 북한 당국과 금강산 공동 개발에 대한 의정서를 체결하는 한편 다양한 남북경협사업을 협의하는 성과를 거둬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특히 금강산 공동 개발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육로를 통한 인원 및 물자 수송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이후 고조된 남북의 정치적 갈등으로 남북경협사업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고 기다린 세월이 소떼 방북이 이뤄진 1998년까지의 9년이다.정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후 1998년 11월 18일, 50여년간 끊어졌던 남북의 뱃길이 다시 열렸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극복하고 공동의 번영을 위해 협력하자는 남북경협사업의 첫 결실인 만큼 높은 관심 속에 그 첫 운항을 시작했다.동해항을 출발한 금강산 관광선 '현대금강호'는 12시간에 걸친 남북의 뱃길을 걸쳐 북한의 장전항에 도착했다. 정 명예회장은 장전항에 도착한 첫 손님으로서 많은 관광객들은 박수를 받으며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었다.정 명예회장은 2000년 6월 28일에 있었던 마지막 방북까지 판문점을 통해, 때로는 금강산 관광선을 타고 북한을 방문해 서해안 공단 개발 사업 등 다양한 남북경협사업을 추진했다. 아울러 통일농구대회를 비롯한 남북의 스포츠 교류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남북한 남녀 농구팀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경기를 치르게 하는 등 교류폭을 계속 확대시켰다.아산재단 관계자는 "정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후 남북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류와 협력의 폭을 넓혀 왔다"며 "기업가이자 남북협력 개척자로서 아산이 보여준 변화의 바람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평했다.배경환 기자 khba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산업부 배경환 기자 khbae@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

헤드라인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