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침묵, 눌변, 다변

박희준 외교·통일 선임기자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뜨거운 논쟁을 낳고 있다.  찬성론자들은 회고록 내용이 "쓸 말을 썼을 뿐"이라고 동조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퇴임한 지 2년도 안 돼 회고록을 출간한 만큼 이 전 대통령이 지금 회고록을 출간한 것은 문제될 게 없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반대론자들은 "대북정책과 자원외교 등 정책 실패에 대한 변명과 핑계로 일관했다"고 일갈한다. 집권 3년 차를 맞아 대북정책의 전환 등을 통해 정책의 성과를 내기에도 바쁜 박근혜정부의 발목을 잡는다고 이들은 몰아세운다. 회고록의 내용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원외교가 짧은 기간 안에 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이 전 대통령 측의 주장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김 전 대통령도 퇴임한 지 2년도 안 돼 회고록을 출간했고 회고록 내용도 전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담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이 왜 지금 회고록을 출간했느냐고 나무랄 수도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회고록에 언급된 한미 쇠고기 협상 내용을 관련 당사자가 강하게 부인하고 있는 점이나 북한 측의 정상회담 대가 요구와 관련해 전문가들이 '협상에 대한 무기'라고 단언하고 있다는 점은 이 전 대통령 측이 곱씹어 볼 사안이라고 본다. 보통 사람 이상의 지략을 가진 정치인들인 이 전 대통령 측 사람들이 이를 몰랐다고 하면 '바보'였을 것이다. 이런 반박, 비판이 밀물처럼 쇄도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음에도 회고록이 출간되도록 했다는 것 때문에 이런저런 의문을 던지도록 한다. 이 회고록이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자원외교 국정조사를 사전 봉쇄하고 박근혜정부의 전 정권 심판의 예봉을 꺾어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질문은 수도 없다.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불행하게도 답은 '그것에 가깝다'로 나오고 있다. 어쭙잖게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다만 한국의 정상외교가 순탄하지 않게 됐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회고록은 한중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의 내밀한 이야기를 여과없이 언급했다. 특히 중국 지도부가 공개하기를 꺼리는 북한에 대한 인식이 상세하게 드러나 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무 외교관들의 전문조차 기밀서류로 분류해 30년 뒤에나 공개하는 게 정부의 정책이다. 하물며 정상 간 대화나 대화록은 말해 무엇하랴. 정상 간 대화를 이런 식으로 공개해버리면 어느 나라 정상이 한국 대통령과 회담하겠다고 쉽게 나서겠는가. 정상회담을 갖더라도 '한국이 곧 공개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발언에 신중을 기할 게 뻔하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이번 회고록은 한국의 4강 외교를 힘들게 했다는 뼈아픈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미 주한 중국대사관 측이 회고록 전문 번역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박근혜정부는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한중 우호관계 수립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번 회고록이 향후 박근혜정부의 4강 정상외교의 발목을 잡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아쉬움이 크다. 외교자산이 고갈돼 막후협상을 공개하는 북한과 남한은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하기가 쉽지 않다.  자원외교나 4대강 사업의 정당성이 하나둘 무너지는 것을 보고 억장이 무너지고 심정이 답답해졌을 것이라고 능히 짐작한다. 그렇더라도 좀 더 참고 숙성시키는 인내심을 발휘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입이 있다고 해서 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글을 쓸 수 있다고 해서 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침묵의 가치를 금이라고 한다면, 눌변(訥辯)은 은이지만 다변(多辯)은 비수가 되기 십상이다. 세 치에 불과한 혀는 잘 놀리면 역사를 만들지만 자칫 잘못하면 멸문의 화를 낳았음은 사마천이 '사기' 곳곳에서 강조한 바다. 박희준 기자 jacklondo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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