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시안게임 폐회식에서 차기 대회 개최지인 인도네시아의 무용수들이 전통 춤을 선보이고 있다.[사진=윤동주 기자] <br />
1988년 10월 2일 밤, 제24회 서울올림픽 폐회식이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렸다. 글쓴이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행사가 TV 화면에 어떻게 비쳐지는지 알 수 없었다. 며칠 뒤 집에서 폐회식 재방송을 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자막이 화면에 깔렸다. 다음 대회 개최국인 스페인의 전통 무용 공연이 펼쳐진 가운데 ‘기인도무’라는 글씨가 떴다. 처음에는 ‘기인도무’로 붙여 읽었고, 그 다음에는 ‘기인 도무’로 띄어 읽었다. 그러는 사이 자막이 사라졌다. ‘무슨 말이지.’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화면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계속 이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식후 공연이 마무리될 쯤에서야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무릎을 쳤다. 기 인도 무(旗 引渡 舞)였다. 대회기를 넘겨주는 무용이라는 뜻이었다. 새삼스럽게 오래전 일이 떠오른 건 지난 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회식에서 차기 대회 개최국인 인도네시아의 축하 공연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공연 시간도 넉넉했고 구성도 알차 보였다. 1988년 ‘기 인도 무’는 공연을 대충 했다는 인상이 강했다. ‘기 인도 무’를 시작으로 자카르타는 1962년 제4회 대회 이후 56년 만에 제18회 대회를 여는 공식적인 절차를 밟았다.반세기 전인 1960년대 초반, 인도네시아는 미국과 소련 중심의 국제 질서에 맞서는 제3세계의 리더를 자임하고 있었다. 1955년 4월 인도네시아가 주도해 개최한 ‘반둥 회의’는 단 한 차례로 끝나고 말았지만 제3세계 나라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았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반둥은 인도네시아 자바바라트 주의 주도다. 이런 격변의 시기에 자카르타는 1958년 5월, 제3회 도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열린 아시아경기연맹[AGF,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전신] 총회에서 파키스탄의 카라치를 22-20으로 제치고 제4회 대회 개최 도시로 선정됐다. 대회는 유치했지만 그 무렵 국제 정세는 인도네시아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아랍 나라들과 중국의 압력에 밀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스라엘(1982년 OCA 창립 과정에서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에 의해 축출되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아시아 무대에서 스포츠 활동을 했다)과 대만 선수단에 대한 입국사증 발부를 거부했다. 이는 AGF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대회 유치 과정에서 이스라엘, 대만, 한국 등 외교 관계가 없는 나라를 포함한 모든 회원국을 초청하겠다고 했던 약속도 뒤집는 일이었다.
인천아시안게임 성화가 소화되고 있다.[사진=윤동주 기자]<br />
이 일은 두 나라의 불참으로 끝나지 않았다. 개최국이 특정 나라의 출전을 막아 버리자 국제육상경기연맹과 국제역도연맹은 이 대회에 출전하는 나라는 제명 또는 각종 국제 대회에 출전을 금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한국은 국제 연맹의 으름장에 육상경기와 역도 종목에 출전하지 않았다. 일본, 인도, 필리핀,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버마(오늘날 미얀마), 실론(오늘날 스리랑카), 태국 등은 국제연맹의 경고에도 육상경기에 출전했다. 역도는 대회 종목에는 들었지만 국제역도연맹은 이 대회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이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잠룡(潛龍)이었던 때였으니 아시안게임은 일본의 독무대였다. 이 대회에서 일본은 경영에 걸린 21개의 금메달 가운데 19개(여자부 9개는 독식)를 휩쓰는 등 70개의 금메달로 종합순위 1위를 했다. 일본 외 나라들이 챙긴 금메달은 인도네시아 11개, 인도 10개, 파키스탄 8개, 필리핀 7개, 한국 4개 등 40개에 불과했다. 중국이 151개의 금메달을 차지하고 카자흐스탄(28개), 이란(21개), 카타르(10개), 우즈베키스탄, 바레인(이상 9개) 등이 금메달 획득 국가 상위권에 든 인천 대회와는 매우 다른 양상이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경기 외적인 면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소득을 올렸다. 인도네시아에서 축구의 인기는 한국에 못지않다. 인도네시아는 아시아나라 가운데 처음으로 월드컵에 출전했다. 네덜란드령동인도(Dutch East Indies)라는 이름으로 나서긴 했지만. 한국은 이 대회 축구 결승에서 인도에 1-2로 져 은메달을 땄다. 준우승에 그쳤지만 1956년(홍콩)과 1960년(서울)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아시아 정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던 한국 선수들의 실력과 페어플레이에 인도네시아의 관중들은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1965년 김일성 주석이 방문하는 등 북한과 가까웠던 인도네시아와 축구를 매개로 어느 정도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으니 적지 않은 스포츠 외교의 성과였다. 요즘은 다소 시들해졌지만 발리 섬은 한때 최고의 신혼 여행지였다. 인구 2억이 넘는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의 세계 8위, 동남아시아 1위 교역국이다. 4년 뒤 한국 선수들이 찾게 되는 인도네시아는 반세기 전 인도네시아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다. 1998년 방콕 대회 이후 20년 만에 동남아시아 나라에서 열리는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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