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의 습격]슴베와 사북(79)

낱말의 습격

우리가 '이름 없는 들꽃'이라 말할 때 최소한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 지상에 어렵사리 한 목숨을 얻어 태어난 존재를, 자신이 모른다는 이유로 고유한 특징을 갖지 못한 존재로 매도해버린 셈이 되는 점이 첫째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전혀 다른 꽃을 상상할 수 밖에 없음으로 생기는 소통의 혼란이 둘째다. 그 꽃이 인간에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이라, 아직 이름을 얻지 못했을 경우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고 대개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들에 피는 꽃이라는 정보 밖에 없는 그 표현은 낯선 외국어처럼 모호한 기표가 되어 소통의 공간에 유령처럼 떠돌 뿐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존재의 존재를 설명하고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꽃 이름, 나무 이름, 별 이름, 사람의 이름.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이름', 어떤 사건의 이름. 그 이름들을 알아야 그 이름이 포함된 외연에 관해 말을 건넬 수가 있고 그 건넨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 어떤 시인은 자신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본 꽃 하나를 보고 자신이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지 못하는 벙어리임을 알고는 수치스러워 한다. 뭐라 부를 것인가. 이름 모를 들꽃이여, 라고?슴베란 칼, 호미, 괭이 등의 자루 속에 들어간 부분을 말한다. 호미, 괭이는 이제 많이 낯설어졌으니, 칼을 생각해보자. 칼의 날 부분이 아닌, 자루 부분. 대체로 많은 칼들은 나무로 된 자루를 가지고 있다. 칼의 쇠부분과 자루의 나무부분이 만나는 곳을 이을 때, 칼끝이 있는 쇠의 뒷부분을 뾰족하게 해서 나무 속에다 심처럼 박는다. 나무 속에 들어가는 이 뾰족한 부분을 슴베라 부른다. 슴베라는 표현을 알 필요가 있을까? 나무 자루를 가진 칼도 흔하지 않은 요즘인지라 슴베는 이제 곧 죽은 말이 될 위험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비유로 쓰는 건 어떨까? 예를 들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슴베 역할을 모씨가 하고 있다는 표현 따위. 하지만 비유도 그 말이 현실적인 쓰임새가 있을 때 실감나게 쓰일 수 있다. 이미 슴베를 설명하는 일이 버거운 요즘에, '슴베같은'이란 말이 과연 와닿는 말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런 실용성과는 달리, 슴베라는 말에는 지나간 한 시대의 '생활사' 혹은 미시사(微視史)가 아기자기하게 상감되어 있다. 그 말을 꺼내어 불러봄으로써 한 시절의 애환과 노동이 딸려나온다. 슴베를 알면 쇠를 악물며 붙잡고 있는 나무자루의 수고를 느끼게 되고, 그것을 단단히 박아넣는 어느 대장장이의 검은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사북은 쥘부채의 아랫 머리나 가위다리의 교차된 곳에 못과 같이 박아서 돌쩌귀처럼 쓰이는 물건이다. 사북은 옛부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물건'을 말한다. 가위다리의 중심에 박힌 그 사북을 빼버린다면 가위는 못쓴다. 부채 아랫 머리에 있는 쇠로 된 돌쩌귀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있어야 가위다리나 부채살은 고정되고 오무렸다 폈다 할 수 있다. 부채는 펴져야 쓰임새가 생기고, 가위는 폄과 오무림이 자유자재로 되어야 쓰임새가 생긴다. 그게 사북이다. 슴베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사북이란 말을 설명하고 나면, 아하 저게 그것을 말하는 구나,하고 우린 고개를 끄덕인다. 사물을 보면서도 그저 이름 없이 형상으로만 기억했던 그 물건이 새삼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오면서 실감을 더한다. 그것이 그저 가위의 한 부위가 아니라, 사북이란 이름을 얻을 때 그것에 관한 애정이 생겨난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치밀해지며 그 기능에서 어떤 메타포를 유추해내기도 쉬워진다. 이름이란, 어떤 사물이 인간에게 인식되는 창문같은 것이다. 이름들은 세상을 다르게 하며 이름들은 세상을 풍성하고 더욱 의미있게 한다. 슴베와 사북은, 몰라도 상관없는 사물의 부위들이지만, 그 이름들에는 나를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다. 하지만 어찌 세상의 사물이 지닌 이름을 모두 알 수 있으리오. 그걸 모두에게 요구하거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일이 어찌 가당키나 하리오. 그건 그저 지적 엄격성을 과시하려는 허영일 지도 모른다. 다만, 다만 말이다. 사물을 호명하는 일이야 말로, 글쓰기의 실마리같은 게 아닐까 한다. 그리고 관계의 실마리. 무엇인가의 이름을 알고 부르는 성실성을 담지한 언어들을 향한 우리들의 짝사랑이야 말로 글쓰기의 정체가 아닐까. 호명의 설렘, 이름과 존재의 그 떨리는 첫 키스. 오직 그의,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 그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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