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기업 임원들은 왜 개를 좋아할까

이정일 산업2부장

'기업 임원들은 개(犬)를 좋아한다.' 근자에 들었던 재계 풍문이다. '좋아한다'를 '먹다(eat)'로 오해하지 마시라. '기르다(keep)'는 관계학적 의미니까. 이유가 그럴 듯하다. 직장 생활의 노곤함이 충성스런 개의 위로를 갈구해서란다. 한 마디로 '견 힐링'이다. 다 커서 데면데면한 아이들, 갈수록 엄해지는 부인. 개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숱하다. 이틀 전 만난 ㄱ기업 임원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할 때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이라면서. 그의 큰 아들은 지난해 군대에 갔고 둘째 아들은 대입 시험을 치렀다. 썰렁한 집안 분위기는 안 봐도 비디오다. 개는 둘도 없는 효자다. 그의 얼굴 위로 설 연휴 첫날 산에 올랐다는 ㄴ기업 임원이 오버랩됐다. 얼마 전 저녁 자리에서 ㄴ임원이 웃자고 꺼낸 얘기였지만 묵직한 뭔가가 목구멍에 턱 걸린 기분이었다.  "연휴 첫날이라 집에서 쉬려는데 집사람이 나갔다 오라는 거야. 설음식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을테고 아이 공부하는 거 방해하지 마라 이거지. 마땅히 대꾸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 '주문'대로 집을 나섰지. 산이나 가자 하고 말이야." 명절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니 등산객은 거의 없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걷는데 어느새 정상에 오른 것이다.  "정상만 보고 걸었으면 지루했을 거야. 그런데 그냥 한발한발 걷다보니 어느새 정상이더라고. 아, 우리 인생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정상에 닿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순간 ㄴ임원 표정이 구도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도 개를 기르고 있을까. 기업 임원은 직장인의 꽃이다. 조직을 위해 젊음을 내던진 보상이다. ㄴ임원 말마따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온 훈장이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임원이 되는 순간 고급 승용차가 나오고 개인 사무실이 생긴다. 연봉 인상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조직에서 인정받았다는,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객관적인 증거다. 하지만 이면은 냉정하다.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시한부 인생이다. 재계약에 실패하면 그날로 짐을 싸야 한다. 졸지에 실업자가 되는 것이다. 승용차와 사무실과 연봉 인상은 정규직과 맞바꾼 '파우스트 거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다. 연말연초 인사 시즌에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끊었던 담배도 다시 잡는다. 줄였던 술도 늘어난다. 혹시나 재계약을 못하면 어쩌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그럴 때마다 엉뚱한 생각이 든다. 차라리 임원 승진을 하지 않았다면 가늘고 길게 갈 수 있을 텐데. 언론들은 임원 승진 소식만 대서특필한다. 하지만 누군가 임원이 됐다는 것은 누군가가 떠났다는 얘기다. 기업마다 수백명, 수십명의 임원들이 정든 일터와 작별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KT가 '임원 잔혹사'로 어수선하다. 황창규 KT 회장은 비상 경영을 선포하면서 전체 임원의 3분의 1을 잘랐다. 30명이 넘는다. 자회사 사장들도 줄줄이 물러났다. 설 연휴 후 출근한 첫 날 걸려온 전화에서 '수고하셨습니다'는 말 한마디가 해고 통보의 전부였다. 혹시나 해고 통보일까봐 걸려오는 전화를 일부러 피했다는 얘기는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은 고상한 선언일 뿐이다. 신참을 위해 고참이 아름답게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당사자에게는 오히려 흉기에 가깝다. 기업 임원은 외계인이 아니다. 누군가의 아버지요, 남편이다. 신참을 위한 용퇴는 결국 누군가의 아버지와 남편이 직장을 잃는다는 것이다.  임원도 아니면서 기업 임원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한 가정의 평화를 염려해서가 아니다. 100세 시대를 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그들의 노하우와 경험은 무한한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갑작스런 은퇴 후 개나 끌어안고 산에나 오르면서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아까운 재능이다. 박근혜정부가 여성 경력 단절을 고민하는 것은 백번 잘 한 일이다. 이참에 기업 임원들의 경험을 살리는 방안도 고민하길 바란다.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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