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기자
매년 파주 출판산업단지에서 개최되는 어린이 책 축제.
[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2000년 4월,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 일대에 건축가와 출판인 100여명이 모였다. 파주출판도시 건설을 위한 기본 작업인 1단계 건축설계 계약을 맺기 위해서다. 바리톤 전기홍 씨의 '선구자'가 공터에 울려퍼지는 가운데 이들은 역사적인 설계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른바 '위대한 계약'이다. 지난 1989년부터 12년간 추진됐던 '출판도시' 건설의 첫삽이 퍼올려지는 순간이었다. 파주출판산업단지가 단순히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공단'이 아닌, 인간성과 인문학의 회복을 꿈꾸는 출판인들의 열망이 담긴 공간인 이유다. ◇파주에 출판단지가 만들어진 이유는 = 출판단지의 탄생은 19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산업적으로는 출판업계의 영세성으로 인한 성장 한계가 도출됐고, 출판업계 내부에서도 공동성의 상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때였다. 지식과 정보의 생산 증가로 국내 출판시장 규모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대학 교육 자율화 등으로 대학생 수는 급격히 증가, 출판시장 규모가 연평균 15% 내외의 경이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고 출판량도 세계 10위권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이같은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 국내 출판산업 구조는 영세성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출판ㆍ인쇄업종이 토지가격이 높은 서울 구로와 을지로에 산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사업주들이 주체가 되어 출판업계의 사업장을 한 데 모으기 위해 1989년 사업협동조합을 구성했다. 사업협동조합은 출판ㆍ출판유통구조의 현대화를 도모하고 지식과 정보를 창출하는 중심기지 창출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적당한 위치에 산업단지를 개발하기 위해 수도권 일원의 여러 곳을 현장답사한 결과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된 곳이 바로 파주였다. 당시 산업단지 개발사업을 추진 중이던 한국토지공사와 협의, 파주시 문발리의 폐 하천부지를 활용해 1994년부터 국가산업단지 조성 추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3년 만에야 토공이 건설교통부로부터 승인을 얻어 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3년이나 걸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특정 산업단지가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받기 위해서는 산업단지내에 입주하는 산업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산업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출판단지 건설을 국가산업단지 차원보다는 민간 주도의 일반산업단지로 조성해야 한다는 정부의 견해가 나왔기 때문이다. 사업협동조합은 여성잡지에 부록으로 딸려나오는 가계부를 조사하고 가계부마다 도서구입비, 교재구입비 등의 항목이 있다는 점을 들어 '출판산업이 장바구니 물가를 통해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득, 결국 1997년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받을 수 있었다.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산업단지 조성은 관(官)이 이끌고 민(民)이 따라오는 형식이었다면 파주 단지는 그 태생부터 달랐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이하 산단공) 관계자는 "사업 시행자가 산업단지를 조성한 후 수요자를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자가 중심이 되어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방식"이라며 "파주 출판단지는 국가산업단지의 역사 속에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좀더 좋은 책을 만들고자 하는 출판인들의 열망도 파주 단지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무분별한 난개발로 인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대도시에서 열악하게 일하기보다는, 출판도시를 세우고 친환경적 건축물들을 세워 일하기 적합한 공간을 만들겠다는 게 '위대한 계획'의 골자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산업단지의 무기력하고 건조한 이미지 대신, 아름다운 책을 편집하듯 도시를 꾸며나갔다. 2000년 첫 건축설계 계약 조인식서 출판사뿐만 아니라 건축가들이 참석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