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라 퐁(Flora Fong)作, '고도의 물고기', 2005~2006년.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시원한 푸른색 바다가 그려진 냉장고에는 물고기들이 줄지어 헤엄치는 모습의 일러스트가 귀엽게 장식돼 있다. 또 다른 냉장고는 오래된 쿠바 자동차로 변형됐다. 쿠바인들이 즐겨 마신다는 맥주 '크리스탈(Cristal)'로 깜짝 변신한 냉장고도 있다. 뜨거운 사랑을 상징하는 듯 하트무늬로 가득 찬 냉장고는 새빨갛다. 한켠에는 마치 인공위성에서 찍은 듯한 도시의 입체적 모습이 조각으로 부착된 냉장고가 회색을 뒤집어 쓴 채 삭막한 느낌으로 서 있다. 냉장고를 제재로 한 쿠바 현대작가들의 작품들이다. 폐기된 냉장고에 일상생활과 관련된 주제를 담아 미술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들이 '냉장고'를 소재로 작업을 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이는 쿠바의 '냉장고 역사'를 들여다보면 답이 나온다.
미구엘 레이바(Miguel A. Leiva)作, '쿠바가 사랑하는', 2005~2006년
일단 쿠바인에게 '냉장고'는 특별하다. 연중 덥고 습한 쿠바에서 냉장고 없는 생활은 상상하기 힘들다. 쿠바인들은 냉장고를 음식을 차게 보관하는 용도로만 쓰는 게 아니라 외출 전에 옷을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 그 안에 넣어 놓기도 한다. 쿠바 일반 가정에 미국산 냉장고들이 보급되기 시작한 때는 1950년대다. 쿠바 혁명 후에도 미국인이 남긴 미제 냉장고는 너무 튼튼해서 쿠바 가정에서 대대로 물려주며 살림살이의 대명사가 됐다. 냉장고는 그렇게 한 가족과 40~50년을 함께했다. 한데 21세기 들어서면서 피델 카스트로는 전기 소모량이 많은 이 오래된 냉장고들을 저렴한 중국산 냉장고로 교체하게 했다. 이때 다량의 냉장고들이 폐기처분됐는데 쿠바 사람들은 버려지는 냉장고와 쉽게 '이별'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냉장고는 쿠바인들과 몇 세대를 함께하며 가족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 같은 쿠바의 '냉장고에 대한 정서'를 살려 그 당시 '냉장고 미술작품'을 탄생시킨 인물로는 작가이자 큐레이터 마리오 미구엘 곤잘레스와 작가 로베르또 화벨로가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해 총 55인의 작가가 50점의 작품을 만들었다. 이 중 10점이 현재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 중이다. 올해 첫번째 기획전시로 전시회의 제목은 '빙고!'다. 빙고(氷庫)는 바로 '냉장고'를 뜻한다.
강제욱, '체의 마지막 혁명-볼리비아 산타크루스 순례기' 사진작품 중 하나
이번 전시는 이들 냉장고 작품과 함께 '정열, 혁명, 사랑, 바다, 여유, 태양, 열대림' 같은 쿠바 사회의 이미지를 연상시켜 만든 국내 작가들의 미술작품들도 살펴볼 수 있다. 또 강제욱 작가는 '체의 마지막 혁명-볼리비아 산타크루스 순례기'라는 제목으로 사진들을 선보인다.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마을, 체가 볼리비아 군인들에게 붙잡힌 장소, 마지막 식사를 하고 처형당한 곳, 비밀리에 매장된 체의 시신이 발견된 바예그란데 지역 공항 활주로 등 작가는 체 게바라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그곳의 현재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해 뒀다. 전시장 내부에는 이러한 사진작품들과 함께 체 게바라가 애용했다는 마테차를 마실 때 썼던 파이프, 시가(cigar) 등이 비치돼 있다. 전시장 정면에는 'VIVA CUBA LIVRE'라는 커다란 글씨가 쓰여 있는데 바로 '자유 쿠바 만세'라는 뜻이다. 또 이곳에서는 쿠바의 대표 술인 럼주와 미국의 대표 음료 코카콜라를 섞은 쿠바 칵테일 '쿠바 리브레'가 소개된다. 전시를 담당한 기획자 중 한 명인 김노암 전시감독은 "쿠바 정부의 냉장고 폐기 정책 시행과 함께 많은 예술가들이 냉장고를 현대미술의 오브제로 이용한 작품을 제작하게 됐다"며 "쿠바혁명과 미제냉장고는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전시는 9월 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1층 전시관. 문의 02-399-1152. 오진희 기자 vale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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