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2장 혜경이 39

악당들은 언제나 농담을 진담처럼 하는 법이다. ‘이라크의 자유’ 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로 그 전쟁도 그랬다. ‘악의 축’ 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선의 전쟁을 선포했던 부시야말로 만화 속 악당이 갖추어야할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배문자의 말처럼 악당들은 이름 하나만은 항상 그럴 듯하게 갖다 붙이는 법이니까. 만화 속 ‘검은 박쥐’도 언제나 입으로는 세계 질서와 세계 평화를 떠들고 다니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언제나 우리의 ‘황금 박쥐’에게 당하고 말았지만.... 이런 세상에서 인류에게 과연 구원이라는 말이 가능하긴 한 말일까? 자기 앞가림도 하기 어려운 처지에 그런 것까지 고민한다면 우스운 노릇일 테지만 어쨌거나 하림은 요즘 종종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차라리 만화라면 ‘베트맨’ 이나 ‘슈퍼맨’ ‘황금박쥐’ 같은 정의의 사자라도 내세울 수가 있으련만 지금 세상을 돌아보면 아무데도, 아무 인간도 정의의 사자처럼 생긴 것이라곤 없는 듯 했다. 그래도 만화는 언제나 정의의 편이다. 그래서 만화가 재미있고, 만화가 위안이 되는 것이다.옛날 애인인 편집자 배문자도 하림에게서 그런 고민이 담긴 만화 대본을 원하고 있을 것이었다. 강력하면서도 세기말적인.... 그러면서도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토리..... 어렵고 복잡한 주문이었다. 하지만 어렵고 복잡한 주문이라 해봤자 만화 대본이었다. 그리고 그 대본은 꽁지머리에 의해 마음대로 짤리고 덧붙여져 어차피 꽁지머리 이름으로 나올 것이었다. “제목은 이미 오현세 씨가 정해두었어. ‘전쟁이 종의 진화에 미치는 영향’ 이라고..... 그 사람 스타일 알잖아. 거창한 거 좋아하는 거.”“전쟁이 종의 진화에 미치는 영향.....?”“응. 생각해보니 너랑도 맞을 것 같은 제목이야. 좀 철학적인 냄새도 나고....”하림이 풋,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하여간 제목은 그렇게 가더라도 내용은 네가 알아서 만들어. 세상에 악당들 모델은 수두룩하니까. 시장 경제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돈을 쥐락펴락하면서 한 나라를 부도내기도 하고, 모두를 가난뱅이로 만들어버리는 월가의 악당들도 있잖아. 영화로도 많이 나와 있지만..... 난 그들을 보면 세상을 모조리 쓸고 다니는 흰개미떼 같은 생각이 들어. 마지막까지 남을 진정한 악당은 그들인지도 몰라.”“어렵구먼.”하림이 짐짓 앓는 소리를 내었다.“걱정 마. 그렇다고 너한테 명작을 바라는 건 아니니까.”하림의 빈 잔에 다시 뜨거운 커피를 채워주며 배문자가 말했다. 배문자는 예전의 단발머리 대신 파마를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에게도 세월의 흔적이 꽤나 보였다.“시골 간다며? 언제가?”하림의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듯 배문자가 일상적인 어조로 말했다.“응. 곧.”“왜?”“그냥. 세상과 좀 떨어져 있어보려구.”“훗, 좀 잘 살어. 인간아.”그래도 정이 남아 있었는지 배문자가 한마디 젖은 소리를 던졌다.“내 친구 중에 황동철이라고 있어. 얼마전에 만났는데 그 친구 왈 자기는 망명정부 수반이래. 나도 망명정부나 만들까봐. ”“망명정부?”“응.”“후후. 재미있네. 그럼 이번 만화에 그 사람 등장 좀 시켜봐.”“그럴까?”하림은 식은 커피를 홀짝거리고 마시며 웃었다.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오진희 기자 vale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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