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2장 혜경이 36

잠시 후, 혜경이 꿈에서 깬 사람처럼 얼른 다시 하림의 가슴에서 나오면서 말했다.“밥 먹을래?”“아니. 아까 말했잖아. 시내에 약속이 있다고. 친구 다니는 출판사에 가기로 했거든.”“그래? 그럼, 이따 밤에 와. 미장원으로....” “알았어.”“늦어두 꼭 와.”혜경이 다짐이라도 하듯 말했다. 하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미장원을 나왔다. 머시멜로 과자봉지를 든 은하가 저만치서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뛰어오는 게 보였다.하림은 차를 근처에 버려두고 대신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복잡한 시내로 나갈 때는 지하철이 그 중 제일 편했다. 배문자가 다니던 출판사는 을지로 5가 부근이었다. 배문자는 하림이 대학 다닐 때 만난, 작달막한 키에 단발머리를 한 여자 친구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런저런 출판사를 전전하다가 지금은 만화전문 출판사의 편집장 일을 맡고 있었다. 하림이 그날 윤여사가 부탁했던 뜻에 따라 윤여사의 고향 작업실로 가기로 작정을 하고나자 그곳에서 할 마땅한 일거리가 없나 해서 전화를 했더니 대뜸 만화 대본을 써보라면서 부른 것이었다.출판사는 중국집 이층에 있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책을 뚫고 들어가자 책상 여기저기에 얼굴이 누렇게 뜬 편집자들이 마치 풀거미처럼 아무도 자기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이 숨어 있었다. 배문자는 그 중 가장 안쪽 낡은 소파가 놓인 벽 아래에 있었다. 하림을 보자 그녀는 가늘게 눈을 뜨더니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근시 안경을 쓰면서,“인간아, 약속했음 빨리 와야지. 그렇잖아도 만화가 오현세 씨, 왔다가 방금 나갔는데..... 올라오다 못 봤어?”하고 원망 투로 말했다.“못 봤는데.....”하림은 배문자의 눈길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앉어. 너랑 이번에 한 팀이야. 영화로 치자면 감독이랑 시나리오 작가인 셈이지.”“오현세 씨랑?”“그래. 아직 이름은 없지만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야. 대부분 만화가가 직접 콘티를 짜서 그리는데 이번엔 내가 고집을 피웠어. 좋은 친구가 있는데 대본을 한번 쓰게 해보라고.....”책상 뒤 테이블에서 원두커피 내리는 기계에 물을 부으며 배문자가 인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하림은 조금 전 계단을 올라오면서 마주쳤던 콧수염을 기른 꽁지머리의 머저리 같은 인상의 친구를 떠올렸다. 그가 배문자의 새로운 애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커피.....?”“응. 좋지.”하림은 아무렇게나 소파에 몸을 던져놓고 앉으면서 사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배문자의 작고 둥근 어깨 너머로 꽁지머리 오현세가 그린 만화 포스터가 커다랗게 걸려있는 게 보였다. 꽁지머리 애인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관심의 표시 같았다. 잠시 뒤 김이 펄펄 나는 포트와 들꽃 무늬가 박힌 하얀 잔을 들고 왔다. 향긋한 커피향이 짙게 코끝에 감겼다.글 김영현/그림 박건웅오진희 기자 vale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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