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한다고 하지만..'..옛 문인·화가가 우정을 나눴던 성북동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김기창-박래현-전형필-최순우-김환기-이태준-김용준-조지훈-김광섭-한용운' 근대 문화예술인들 옛 자취 곳곳에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그만 금이 갔다시인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다. 1960년대 성북동이 막 개발될 시기, 시인은 성북천이 복개되고 나무가 쓰러진 곳에 수많은 빌라와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는 성북동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을 이처럼 노래했다. 시인 자신도 이곳으로 이사 올 당시 뇌출혈로 쓰러질 정도로 동네처럼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지금 성북동은 또다시 찾아온 재개발 위기에 꿈틀거린다. 조지훈, 한용운, 김환기 등 옛 문화예술인들의 향기가 보존돼 있는 이곳에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설까봐 오래 살아온 주민들의 아쉬움이 커져간다. 지난 12일 이미 재개발 아파트 분양신청을 진행 중인 성북2동을 찾았다. 한성대입구역에서 외국인 대사촌 방향인 북쪽으로 오르다보면 곳곳에 재개발 반대 현수막이 걸려있다. 지난 2005년 7월 재개발 추진위가 승인되고 6년이 흐른 지금 성북3구역 재개발 지역은 사업시행인가를 마친 상태다. 성북3구역 인근으로는 문화재들과 옛 문인, 화가들의 흔적이 담긴 유적지들이 구석구석 자리해있다. 극단이나 화랑, 까페 등 문화공간도 여럿 눈에 띈다.
바보산수로 알려진 운보 김기창과 그의 아내이자 근대여성화가 우향 박래현의 그림들이 전시된 '운우 미술관'
이곳 주민인 한재수(남 50대)씨는 "재개발이 그대로 추진된다면,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의 보금자리이자 작업실이던 '운우미술관'마저 헐릴 위기에 놓여진다"면서 "전시실 용도로 지어진 미술관보다 작가의 산실이자 근대 문화재급인 미술관은 격이 다르다"고 강하게 아쉬움을 표했다.운보 김기창은 1만원짜리 세종대왕 영정의 도안을 그린 주인공이다. 어릴 적 장티푸스에 걸려 청력을 잃었지만, 열일곱에 그림을 배우면서 크게 두각을 드러낸 화가다. 근대여성화가인 우향 박래현은 운보와 결혼해 성북동에서 함께 그림을 그렸다. 우향과 사별한 후 아내를 그리워하며 집터에 지은 건물이 바로 운우미술관이다. 운보는 지난 2001년 타계했다. 운우미술관 위로는 간송미술관이 있다. 재개발로 헐리진 않지만 이곳 역시 미관과 역사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주민들의 걱정에서 비껴가지 못한다. 지난 1966년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유출된 우리나라 전적, 서화, 도자기, 불상 등 미술품과 국학자료를 수집해 이곳에 보관했다. 현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에서 찍은 사진이 남겨져 있는데 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이 그의 옆에 앉아있다. 전형필은 오세창을 스승으로 모시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현재 간송미술관은 일 년에 딱 두 번 봄, 가을 2주씩 무료로 전시를 개방한다. 지난해에 이어 올 봄 전시를 찾는 이들이 3~4시간씩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절정이었다. 과거와는 다른 현상이다. 이곳 한 주민인 박 모(여 20대)씨는 "지난 가을부터 미술관 뒤 초등학교 담장까지 줄줄이 이은 줄을 보고 너무 놀라웠다"면서 "성북동에 이런 귀중한 옛 문화 산실이 많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이곳 재개발 지역 인근엔 서울성곽, 선잠단지, 성락원 등 문화유적지들도 자리해있다. 선잠단지는 조선시대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를 지내던 곳이었다. 양잠의 신인 서릉씨를 모시고 지낸 제사다. 이곳 선잠단은 1908년 선농단의 신위와 함께 종로구 사직단으로 옮겨졌고, 일제강점기에는 개인소유가 돼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성락원은 서울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조선시대 별장으로,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것이었다. 200~300년 된 엄나무와 느티나무 등 울창한 숲이 내원을 가려주고 있다.
왼쪽부터 최순우 옛 집, 수연산방, 심우장. 최순우 옛 집은 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故 최순우 선생(1916~1984년)이 1976년부터 작고할때까지 살았던 고택이다. 지난 2002년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매입해 '시민문화유산 1호'가 됐다. 이어 월북 소설가 故 이태준 선생이 기거했던 집 성북동 수현산방. 지금은 전통찻집으로 운영중이다. 마지막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마지막 기거처였던 곳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성북동 재개발 지역을 걷다보면 옛 문인과 화가들이 교우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길상사로 올라가는 입구 건너편 미술사학자였던 혜곡 최순우 옛집이 있다. ㅁ자 아담한 개량한옥의 이 집은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1호이기도 하다. 가운데에는 정원과 우물터, 소나무가 고풍적인 멋을 더한다. 이 집엔 서양화 한 점이 벽에 걸려있는데, 그림을 그린 작가가 바로 동네 주민이었던 김환기 화백이다.더 위로 올라가면 소설가 상허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이 보인다. 현재는 전통찻집으로 운영 중이다. 이태준은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 소설을 남긴 월북작가다. 고아로 철원 용담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고향의 자연과 가장 닮은 동네를 서울에서 찾은 게 바로 성북동이었다. 수연산방은 '자연에 모인 문인들의 집'이라는 이름답게 이태준의 외증손녀가 물려받아 당시 문인들이 추천해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가까운 거리엔 '노시산방' 터가 있는데, 1949년 우리 미술사의 기틀을 잡아준 책 '조선미술대요'를 펴낸 화가 김용준이 살던 곳이다. 김용준이 이태준에게 물려받은 집으로, 늙은 감나무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수필체로 써진 그의 책은 미술교과서로 채택돼 일제 때 왜곡된 우리 미술역사를 바로잡았다. 1930~40년대 당시 성북동 주민 이태준과 김용준, 김환기 이 셋은 전통목공예나 도자기를 모으는 취미를 공유했다. 우리나라 추상1세대 김환기의 화풍이 완전추상으로 바뀌기 전 도자기나 나무 등 자연적인 모티브가 많이 나타난 배경이다. 노시산방은 김용준이 떠나고 김환기가 들어와 살게 된다. 같은 집이지만 두 화가가 다른 시간에 살았던 공간이다. 한데 이곳은 이제 터만 남아있다.길 건너 언덕과 서울성곽으로 이어지는 골목길로는 만해 한용운이 마지막으로 기거했던 '심우장'이 있다. 사후에는 그의 딸이 이곳에서 지냈다. 이곳은 개인 집이긴 했어도 한용운을 따랐던 많은 민족운동가, 학생들과 시인, 소설가들이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시민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한용운도 동네주민으로 친분을 두텁게 갖던 시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지훈이다. 청록파 시인인 조지훈이 청록집을 발간했던 터도 성북동에 있다. 옛 문화향기가 가득한 성북동의 재개발을 재검토하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50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온 주민 허상기(남 78)씨는 "오랫동안 가까운 지인들이 다 이곳에 살고 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한다니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주민 김 모(여 30대)씨는 "아파트식 개발에 서울이 정서적으로 메말라간다"면서 "성북동의 특색 있는 집들, 자연적인 공원은 우리나라 고유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는데 재개발로 이런 것들이 사라질까 두렵다"면서 걱정했다. 오진희 기자 vale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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