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의 인기가 지속하고 있다. 은행나무출판사 테마소설집 시리즈 '바통'은 일곱 번째 기획의 주제를 '빙의물'로 잡고 작가 7인의 '빙의물'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빙의물은 단순한 판타지물을 넘어선,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현대사회 속 개인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아닌 존재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며, 어떤 순간에는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어떤 초월적 힘이나 예지를 통해 현실을 바꿔나갈 힘이 있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빙의물'은 이러한 기대를 자극하며 이 평범한 현실로부터 여기가 아닌 어떤 세계로 탈출할 가상의 출구가 돼준다.
예은은 지금껏 살면서 자신의 마음이나 정신이 위태로울 정도로 약해지는 순간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힘든 일이 생기거나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그랬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남에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저 혼자 끌어안고서 그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선을 넘지 않고 이 세상에 남으려 힘껏 버텼다. 지원이 우울한 목소리로 밤에 전화를 걸어와 몇 시간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들어주고 나면 온몸에 힘이 빠졌다. 지원과 있으면 함께 파도에 삼켜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은은 우울과 불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파도가 자신을 선 너머의 세계로 데려가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1년 전에 지원은 그 파도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파도가 지원을 휩쓸고 가버렸다. 지원은 선 너머의 세계로 가버린 것이다. - 25~26쪽, 이종산 〈두 친구〉
영혼은 슈크림. 달콤하다는 뜻은 아니다. 노즐을 통해 규웃 하고 주입될 수 있는 형태라는 의미.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내 영혼은 그런 형태일 것이다. 나를 느껴보려고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내린 결론. 물론 슈크림이라거나, 노즐을 통해 주입되는 느낌이라는 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흘러내리는 슈크림의 이미지는 가장 범박하면서도 직관적이어서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게 대답하기로 오래전 마음먹었다. 물론 입이 생겼을 때의 이야기. 그러려면 기다려야 한다. 안으로 주입되는 감각은 끔찍하다. 묽어진 상태로 후두둑 툭 하고 떨어지는 느낌. 어떻게 설명해도 내가 느끼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테니 굳이 이해시킨다거나 납득시킨다거나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는 설명해보려 애쓴다. 그것 없이는 존재를 실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한 것. - 39~40쪽, 조시현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
"사는 게 너무 외롭고 괴로울 때요. 나는 내가 지구라는 몸에 잘못 빙의된 영혼이라고 생각했어요. "K는 다음 타임 근무자를 위해 카운터를 정리하며 둘 모두에게 말했다.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다. 이런 삶이 진짜 내 것일 리 없다. 이번 판은 연습이다. 뭐 그렇게 생각한 거죠. 그런데 방금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이제는 내가 있을 진짜 자리가 따로 남아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그 자리에는 누군가 또 잘못 놓여 있을 테니까." - 118~119쪽, 현호정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
거기에 돌을 구경할 수 있는 정원도 있다던데. 천년만년 된 돌 몇 개를 두고 하잘것없는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반성에 반성을 거듭하는 거지. 그런데 왜 인간들은 걸핏하면 반성을 하는 걸까. 전쟁 일으키고도 반성, 누구 죽여놓고도 반성, 사랑을 못 이뤄서 반성. 하긴 그러고 보니 나도 여동생을 잃고도 고작 반성을 했어. 애도를 한 게 아니지. 이선은 항상 유스케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부정적인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할 때는 자신의 죄를 묻는 듯 소환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살한 사람의 유가족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선도 아직 그러하니까. 이선이 별말이 없자 유스케는 잠시 음, 하더니 입을 열었다. 뭐 여신님을 만나고 나면 그곳에도 가보라고. 대신 이제 더는 반성하지 마. 이선 너는 잘못이 없으니까. 유스케는 그리고 한 번 더 말을 크게 삼키듯이 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워만 해, 너는.
- 148~149쪽, 한정현 〈어느 날 여신님의 다리 위에 우리가〉
"자기가 남이 되고, 남이 자기가 되는 걸 봐야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 세상이 지옥인 걸 알아야지. 민희야. 그때도 지금도 우리가 본 영상에 우리가 어디 있어?"
"……이건 너도 나도 아니지. 그러니까 뒤바뀐 걸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는 거잖아."
"맞아. 그 영상을 찾아보려는 사람이 거기 불려 가야지. 어울리는 걸 어울리는 곳에,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둬야지. "선우 민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베개 옆의 수건을 건넨 나는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커튼을 젖히기 전에 말했다. "우리는 계속 따라갈 거야. 계속 쫓아갈 거야. 사진은 사진으로, 영상은 영상으로, 피해자는 가해자로 계속 덮어쓸 거야." - 187쪽, 박문영 〈덮어쓰기〉
드러누워 호흡을 고르는 동안 나는 이게 꿈이어야 하는 당위와 꿈이 아니라는 증거들을 차례차례 더듬어보았다. 첫째, 내 이름은 인영이 아니라는 것. 둘째, 동계 올림픽 시즌이 아니고서야 내가 스키라는 스포츠에 관심을 가진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는 것. 셋째, 삼십대 싱글 스키 동호회 회원 강인영은 내가 전날 보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라는 것.
- 197~198쪽, 박서련 〈니가 왜 미쳤는지 내가 왜 알아야 돼〉
"탈퇴 후 30일간 동일한 이메일 주소를 이용한 회원 가입이 제한되며, 동일한 개인정보를 이용한 본인인증 또한 30일간 제한됩니다." 푸른 글자로 돋워 새겨진 고지를 뒤로 하고 계정을 삭제했다. 미련 없어진 글에 대한 계약 제안들도 함께 파묻었다. 환생이 약속된 의사(擬似)의 죽음이었다. 너는 성공에 이를 때까지 거듭해 죽으리라 마음먹었다.
- 259~260쪽, 정수읠 〈이 시점에 문필로 일억을 벌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내 인생이 알고보니 내 인생이 아님 | 이종산 외 6명 | 268쪽 | 1만7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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