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한 봄의 기운이 여름의 따가운 햇살로 바뀌어가는 사이 나뭇잎은 어느새 짙은 녹색을 띤다. 이젠 여리고 부드러운 잎이 아닌, 조금은 단단하고 성숙한 잎이 되어 나무의 생존을 위해 열심히 일할 준비가 되었다. 잎의 계절 속에서도 태생적으로 여름을 즐기는 몇몇 나무들은 따가운 햇살 속에서 꽃을 피운다. 화려한 노란 꽃의 모감주나무, 황백색 꽃의 회화나무, 분홍빛이 아름다운 배롱나무 등이다. 건강한 초록의 잎 사이에 핀 꽃들이어선지 봄꽃보다 더욱 풍성해 보인다.
봄 사이 일찌감치 꽃 잔치를 끝낸 나무들은 빽빽해진 나뭇잎 사이에서 조용히 다음 일을 준비한다. 바로 열매를 맺는 일이다. 무성해진 나뭇가지 사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빛 꽃받침 자리에 작은 알맹이가 언뜻 보이는데, 자칫 놓치기 쉬운 작고 미미한 존재다. 열매가 여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 조그마한 존재가 여름내 관찰 대상 1호다.
여름은 잎의 계절인 동시에 열매를 키우는 시간이다. 벚나무처럼 여름이 오기 전 일찌감치 열매를 만들고 떨어뜨리는 부지런한 나무도 있지만 대부분의 나무들은 여름 동안 열매를 맺고 살찌운다. 나무마다 독특한 구조의 열매가 어떻게 시작되고 여물어가는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시기다. 흰말채나무에는 흰 열매가, 새머루에는 푸른색 열매가, 작살나무에는 자주색 열매가 매달리며 풍성한 색을 연출한다. 연둣빛으로 시작된 어린 열매가 익어가면서 보여주는 색의 변화는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색을 확인시켜준다.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변해가니 과연 생명이기에 가능한 모습이다. 열매는 보석처럼 빛나며 여름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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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나를 골라 흰 종이 위에 천천히 그리다 보면 열매들이 어떤 배열로 매달려 있는지, 그 표면은 어떤 촉감인지, 줄기들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선명히 보였다. 한번 그림으로 그린 대상은 잊어버리는 법 없이 두고두고 마음에 각인되었다. 어디에서건 다시 만나면 단번에 알아보고 인사할 정도였다. 혼자 조용히 그림을 그리는 일상 속에서 낯선 나무들이 점점 익숙하고 친근한 존재가 되었고, 여름이 끝나갈 즈음엔 그 모두가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졌다.
-한수정, <나는 식물을 따라 걷기로 했다>, 현암사, 1만5000원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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