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M의 컴퓨팅서브시스템(CSS)
지난해 하반기에 처음으로 공개
성공하면 반도체 시장 지분 확대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기업은 ARM입니다. 역대 최고 분기 실적을 기록하며 제2의 엔비디아로 지목되기도 했지요. 전반적인 반도체 경기 부진 속에 ARM의 매출을 견인한 건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래픽처리유닛(GPU) 대표주자 엔비디아가 ARM의 디자인으로 데이터센터 칩인 '그레이스'를 만듭니다.
하지만 물밑에는 ARM의 변화하는 비즈니스 모델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실 앞으로 ARM의 미래를 결정할 차세대 성장 동력은 일명 'CSS(Computing Sub System·컴퓨팅서브시스템)'라 불리는 새로운 서비스입니다.
스마트폰 칩 99% 장악한 ARM, 그러나…
분명 ARM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반도체 기술 기업 중 하나입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설계의 99%를 장악하고 있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동차 프로세서, 사물인터넷(IoT), 공업용 마이크로컨트롤러, 데이터센터 칩까지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ARM의 성장세는 사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인수한 뒤로 한계를 맞이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팹리스와 비교하면 상황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엔비디아의 매출은 2016년부터 2022년까지 5배 넘게 성장했습니다. 퀄컴도 거의 2배 성장했습니다. ARM은 약 59% 성장했습니다. 꾸준히 매출을 늘리긴 했지만, '반도체 붐'에 어울리는 성적은 아닙니다.
ARM이 일반 팹리스보다 매출 증가율에서 뒤처진 이유는 비즈니스 모델에 있습니다. ARM은 완성된 디자인을 파운드리(위탁생산업체)에서 생산한 뒤 직접 판매하는 벤더(vender)가 아닙니다. 대신, 다른 팹리스에 칩 설계의 기초가 되는 명령어 집합(ISA)과 코어 디자인의 사용 권리를 판매합니다.
ISA와 코어 모두 칩, 특히 전자기기에서 사실상 두뇌 역할을 하는 중앙처리장치(CPU)의 핵심입니다. ARM이 반도체 가치 사슬의 중심으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코어는 칩의 전부가 아닙니다. 여전히 완제품 CPU를 만들려면 다양한 구성 부품을 따로 설계해야 하며, 테스트도 거쳐야 합니다. 이런 '엔지니어링'은 지금까지 팹리스들이 직접 수행해 왔지요. 이 때문에 ARM이 컴퓨터 칩의 '총 판매액'에서 가져가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ARM의 활동 영역은 점차 위협받기 시작합니다. 무료 오픈소스 ISA를 제공하는 RISC-V가 대표적입니다. 또 ARM의 주요 고객이었던 퀄컴은 아예 코어까지 직접 설계한 '오라이온(Oryon)' CPU를 내놨지요. ARM의 아이러니입니다. 분명 반도체 설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지만, 다른 고객들이 점차 기술과 노하우를 누적해 가면서 '독립'을 꾀하기 시작한 겁니다.
정체된 ARM 새 비밀 무기, CSS
이때 ARM은 지난해 8월, CSS를 출시했습니다. CSS는 기존 ARM의 '디자인' 제품과 차별화됩니다. 현재 ARM은 애플, 퀄컴 같은 고객에 ISA 사용 권리를 판매하거나, 다른 팹리스 업체에 코어 디자인 사용권을 부여하지요. 하지만 CSS에선 'CPU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통으로 판매합니다.
CPU의 기초 단위인 코어도 전기 신호(클록), L1/L2 캐시 등에 따라 성능이 달라집니다. 한편 AI 시대가 시작되면서 칩과 메모리(D램, HBM 등) 사이를 연결하는 인터커넥트 기술이 중요해졌고, 최근에는 칩의 각 다이(die)를 연결해 더 강력한 성능을 발휘하게 해주는 칩릿(Chiplet)도 있지요. 과거 팹리스들은 이런 다른 구성 요소는 스스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CSS는 이 모든 걸 한 번에 지원하고, 마무리 테스팅까지 ARM에서 지원합니다.
CSS를 통해 ARM은 ARM 기반 반도체 생태계에서 더 큰 수익 비중을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또 고객사가 ARM의 기술력에 더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해자(Moat·기술적 지배력)를 공고히 할 수 있습니다.
단점도 있습니다. CSS는 마치 조립된 레고 블록처럼 대부분이 이미 '고정된' 디자인입니다. CSS 디자인을 구매한 고객들은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완성품 칩을 디자인할 수 있겠지만, 대신 각자의 필요에 따라 커스텀 하기는 어렵습니다. ARM의 장점이었던 유연성을 다소 희생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반도체 중립국' 지위 유지하며 시장 확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누가 CSS를 사게 될까요. 바로 클라우드 컴퓨팅 업체들입니다. 사실 이미 CSS는 중요한 고객을 벌써 둘이나 확보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이크로소프트(MS)로, 지난해 11월 MS가 공개한 애저(Azure) 클라우드 탑재용 자체 CPU '코발트 100'이 CSS로 만들어진 제품입니다. 두 번째는 최근 ARM CSS와 인텔 18A(옹스트롬) 공정을 채택한 대만 '패러데이 테크'입니다. 이 외에도 이미 ARM 코어를 사용 중인 아마존 AWS가 CSS로 합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전까진 클라우드 업체들은 인텔, AMD, 엔비디아 등 벤더로부터 데이터센터용 칩을 구매해 왔습니다. 하지만 데이터센터 산업의 규모가 커지고 자체 보급망을 수립할 필요성이 가시화되면서, 이제는 직접 반도체를 디자인해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략을 보통 '수직 계열화'라고 합니다.
이미 자체 칩을 만들 거대한 설계 인력을 보유한 팹리스들에 CSS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새로 디자인 팀을 만들어야 하는 클라우드 업체들에는 다릅니다. 자체 칩으로 팹리스들의 최신 칩 성능을 따라가려면 적어도 13~18개월에 한 개의 새 칩 디자인을 내놔야 하는데, 이처럼 개발 페이스를 가속하려면 CSS가 제격입니다.
실제로 ARM 또한 CSS 최대 강점으로 "엔지니어링 소요 시간을 80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즉, 최고 수준 반도체 R&D 엔지니어 80명이 1년간 수행할 업무량은 CSS가 대신할 수 있다는 겁니다.
팹리스들에 ISA와 코어 디자인을 납품해 온 ARM의 특성상, 직접 반도체를 만들어 판매하는 전략은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파괴할 겁니다. ARM은 '반도체 기술의 중립국'을 자처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올랐으니까요. 이 때문에 CSS는 매우 흥미로운 전략입니다. 클라우드 업체들 스스로 반도체를 만들 수 있게 해줌으로써, 팹리스와 직접 경쟁하지 않고도 팹리스들과 동일한 서버 칩 시장을 노리기 때문입니다.
아직 서버 칩 시장은 인텔과 AMD가 헤게모니를 두고 다투는 중입니다. ARM 기반 서버 칩은 이제 막 작은 모멘텀을 얻은 실정이지요. 하지만 CSS가 인기를 얻으면서 더 많은 클라우드 기업들이 자체 반도체 생산으로 전환하면, 언젠가는 거대 팹리스 벤더들도 ARM을 의식하게 될 겁니다.
과연 ARM이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면서 지금보다 돈도 훨씬 많이 벌 수 있게 될지, 아니면 팹리스들과 가혹한 경쟁에 휘말리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겁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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