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은 처음에 불과 불의 대결을 떠올렸는데, 점차 ‘이건 불과 물의 싸움이 돼야겠다’고 생각이 바뀌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는 더 차분하고 신중한 이태신의 자세를 표현하려고 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배우 정우성은 숨 가쁘게 흘러가는 1979년 12월 12일, 그날 밤 아홉 시간 동안에도 정중동(靜中動)을 잃지 않는 이태신 장군으로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 꼿꼿하게 서 있다. 대부분의 극 중 캐릭터가 실존 인물과 이름 한 글자 차이로 누구인지 단번에 유추가 가능한 반면 이태신은 명확한 실존 인물이 존재함에도 전혀 다른 이름과 성격, 캐릭터를 부여해 유일하게 이 서사가 극화(劇化)된 것임을 증명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 때문에 김성수 감독의 생각, 바람, 희망, 그리고 가정이 온전히 들어간 이태신을 그의 페르소나인 정우성이 연기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지 않았을까.
“처음엔 ‘서울의 봄’ 캐스팅 제안을 거절했다. 막 촬영을 마친 ‘헌트’의 김정도나, ‘서울의 봄’의 이태신 모두 한 인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인데, 외적으로 유사한 대립 구도가 관객이 이태신이라는 캐릭터를 보는데 하나의 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그런데 감독님이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래? 그러면 작품 엎지 뭐’라고 협박을 하셔서.(웃음)”
실제 사건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장군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대중에겐 MBC 드라마 ‘제5공화국’의 “야, 이 반란군 XX야” 대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김 감독이 당초 ‘불과 불의 대결’을 떠올린 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인물 간 대결을 구상했기 때문이나, 이내 감독은 시선을 바꿔 ‘불과 물의 싸움’을 구현하는데 몰두했다. 이처럼 캐릭터 해석 폭이 넓어진 순간, 정우성은 오히려 의미부여를 피하기 위해 애썼다고 말했다.
“이태신을 통해 어떤 의미가 전달되길 원하진 않았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캐릭터는 그 의미를 쫓게 되니까. 우리 모두에겐 전두광이 있을 수도 있고, 육군본부의 우유부단한 장군들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이태신 처럼 자기 직무에 충실한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나. 관객이 ‘서울의 봄’을 보고 이태신을 지지하게 되고, 공감한다면 그 캐릭터를 통해 내 안의 어떤 일맥 하는 감정을 발견한 것 아닐까.”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는 개인에게서 표명되는 자유, 집단에서 나타나는 필연을 종합해 역사적 필연성을 구성하기에, 역사가는 ‘본래 그것이 어떻게 있었는가’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성수 감독은 ‘서울의 봄’에서 역사적 필연성의 자리에 가상의 인물 이태신을 두고, 본래 그것이 어떻게 있었나를 전두광을 통해 표현하며 12.12 군사 반란 현장을 자신의 관점으로 기술해나간다. 통상 가정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과를 뒤집고 싶어하는 희망적 상상에서 출발하지만, 서울의 봄에서는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직조하기 위해 쓰인다. 역사적 결과는 유지하되 당시 본분을 지켰던 인물에 투영한 김성수 감독의 희망은 그래서 더 절망적이다.
“이태신은 계속 답답하고 궁지에 몰리는 심정을 갖게 되는데, 이를 감정적으로 표출하지 않기 위해 계속 안으로 되새겼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것, 그것이 이태신을 완성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현실의 12월 12일 밤 광화문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극 중 이태신의 분투는 허무하게 스러진 그 날 밤, 누군가 느꼈을 절망과 이후 펼쳐질 엄혹한 시절에 건네는 위로이자 자책이었다.
가정과 사실이 혼재하는 장대한 광시곡의 중심에서 정우성은 마치 역사처럼 직조된 작품의 완성도를 비롯한 모든 공을 감독에게 돌렸다.
"김성수라는 뛰어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작품이었다. 이 많은 배우가 나오는데 누구 하나라도 영화 속 세계관의 톤 앤 매너에 맞지 않았다면 좋은 협주가 될 수 없다. 많은 배우가 나온다는 건 그만큼 위험 요소도 많다는 건데, 감독이 그 모든 배우를 1979년 당시 그 자리에 있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 관찰하고, 접점을 찾고,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분명하게 노력한 작업이었다. '서울의 봄'은 배우들의 톤앤매너가 잘 어우러진 작품이고, 김성수 감독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사람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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