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된 아파트 단지와 다가구주택·원룸 존재
전면적 재정비는 어려워
동네 곳곳 포켓 파크 설치 등
작지만 현실적인 정비 필요
외국인들에게 서울은 주로 사대문 안의 역사적 공간 또는 강남의 화려한 도심 이미지로 떠오른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한국의 대중문화 역시 이 지역이 상징하는 바가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서울은 이보다 훨씬 크고 다양하다. 이런 서울의 다양성을 찾는다면 나는 강서구에서 관악구로 이어지는, 인구 약 300만명의 서남권 지역을 꼽고 싶다.
서울 전체 면적의 약 27%, 서울 전체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는 이 지역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강서구와 양천구는 서울시에 늦게 편입되긴 했지만 주로 중산층 주거지로 개발되었다. 영등포구와 구로구, 금천구는 경부선이 지나는 지역으로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공업지로 개발된 곳이다. 동작구와 관악구는 언덕이 많은 지형 특성상 개발이 어려운 탓에 꽤 오랫동안 저소득층 주거지였다가 최근 들어 재개발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이렇듯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닌 권역으로 묶인 서남권은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아 도시 계획상 늘 관심을 받아온 데다 그 역사를 보면 도시 계획의 실험장이기라도 한 듯 꽤나 흥미롭다. 이 지역의 가장 큰 특징은 비어 있는 땅에 계획적으로 신도시를 세웠다는 것, 그리고 공업 지역을 상업과 주거 공간으로 새로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영등포구에 속한 여의도는 해방 이후 1971년까지 공군 기지로 사용한 뒤 비어 있던 땅이었다. 텅 비어 있던 이곳은 1970년대 초부터 최초의 신도시로 개발된 이래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1980년대 초가 되자 목동 안양천 옆의 빈터에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이른바 ‘서남권의 강남’으로 부상했다. 이렇게 개발된 여의도와 목동은 여러모로 실험적인 측면이 많았다. 1970년대 서울에서 여의도의 바둑판 도로와 아파트 단지 형태는 매우 독특한 것이었으며 12층짜리 시범아파트는 그때만 해도 가장 높은 아파트였다. 또한 목동 아파트 단지의 녹지 확보는 이후 아파트 개발에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서남권은 또다시 들썩였다. 경제 급성장기 지역에서 올라와 주로 봉천동이나 신림동 등 상대적으로 주거 환경이 열악한 지역으로 모여든 서민들의 주거 공간이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면서 재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거 환경을 개선하려는 취지에서 시작한 이러한 재개발은 도시를 시대에 맞게 개선하는 행위라는 측면에서는 일종의 도시 재생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도시재생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사례인 옛 구로공단도 서남권에 속한다. 임금이 싼 노동집약형 제조업에서 전문인력 중심의 기술과 지식 산업으로 산업지형도가 바뀜에 따라 제조업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구로공단은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드넓은 부지를 기술과 지식 중심 산업 지형으로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주거지와 쇼핑 공간을 포함시켰다. 그런 한편으로 역사 보존의 필요성을 의식, 예전 공장 몇 개를 남겨 새로운 목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G밸리 산업박물관,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 같은 문화시설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지난 시대 노동자들의 역할을 존중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서남권 전체가 새롭게 달라지기만 한 건 아니다. 일제강점기 공장들로 가득했던 문래동은 그 특징을 살려 예전 공간을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술 마을로 변신했다. 뉴트로 감수성까지 이어져 핫플레이스가 된 지도 이미 오래다.
서남권에는 전통시장도 많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는 새로 유입된 주민들과 외국인 이주민들에게 인기를 끄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조선족과 중국 이주민이 많이 사는 대림 중앙시장 주변은 새로운 ‘차이나타운’으로 떠올라 활기가 가득 차 있다. 비교적 집값이 저렴한 편이라 노동자나 상인은 물론 전문직, 창업자, 젊은 직장인, 그리고 학생들까지 다양한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것도 이 지역의 특징으로 꼽을 만하다. 때문에 이 지역은 영화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이 보여 준 서울의 서민들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도의 지식산업의 현장과 다양한 외국인 이주민들이 함께 사는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서울의 머지 않은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서울이 앞으로 더욱 다양한 특징이 섞여 있는 도시로 발전할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나는 그 가운데 서울의 서남권이야말로 다른 어느 지역보다 흥미로운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한강의 기적’의 산물인 여의도와 목동, 미래 산업 중심지로 새로 탄생한 공장 지대, 학생들은 물론 젊은 직장인들과 외국인 이주민 등이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지역이 한데 모여 있는 모습은 서남권의 특징이자 곧 희망이다.
이러한 희망이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살기 좋은 지역이 되기 위해서는 해결할 과제도 만만치 않다. 이 지역의 값싼 주거 공간은 주로 다가구 주택이나 원룸들이다. 때문에 인접 도로는 매우 좁고 녹지는 부족하다. 다시 말해 주거 환경이 결코 좋은 편이 아니다. 아파트 단지와 다가구 주택 지역이 갖는 인프라와 주거 환경의 격차로 인한 ‘삶의 질’의 차이도 크다. 도시 안에서 저렴한 주거 공간의 공급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모두 다 화려한 아파트로 재개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다가구 주택 밀집 지역의 주거 환경 개선을 미룰 일도 아니다. 물론 대대적인 변화를 당장 촉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당장 현실 가능한 부분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이를테면 녹지 확보와 도로 정비에 조금만 신경 써도 효과는 확실해질 것이다. 곳곳마다 작은 규모라도 ‘포켓파크’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그래봐야 나무 몇 그루, 벤치 몇 개로 큰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녹지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이런 변화로도 환경개선 효과가 매우 크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행로 표시를 명확히 하고, 가로수를 심어보면 어떨까. 이 지역 주민들의 만족도는 크게 상승할 것이다. 그렇게 작지만 큰 변화를 조금씩 시도해간다면 서남권은 서울 안에서 미시적 주거 환경 개선의 새로운 모델로 부상하며 도시 환경 변화의 단초가 되어주지 않을까. 지나온 시간이 그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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