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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서울을 생각하다] 왜 벽화가 호응받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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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서울을 생각하다] 왜 벽화가 호응받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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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름, 일본 가고시마에 살던 나는 틈날 때마다 한국을 찾았다. 기내 비치용 잡지에서 서울 종로구 이화동 벽화마을을 봤다. 1980년대 혜화동에 살았지만 어딘지 생소한 곳이었다. 호기심이 일었던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 벽화마을을 찾았다. 평일 한낮,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훗날 명소가 된 ‘꽃 계단’이며 ‘물고기 계단’을 독차지했다.


한국 도시에서 벽화를 본 건 처음이었다. 1970년대 내가 다닌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의 중학교 복도에는 화려한 벽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나 맬컴 엑스의 초상,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의 상징인 평화 기호 등이 벽화 속에 등장했다. 벽화는 학교뿐만 아니라 시내 곳곳 건물 벽마다 볼 수 있었는데, 대체로 반골 성향이 다분히 드러나 있었다. 그런 영향 덕분에 내게 벽화는 곧 반골 정신의 표현이었다.

이화동 골목의 벽화들 역시 자연스럽게 그 틀의 연장으로 여겨졌다. 1980년대 초 독재정권 치하였던 한국은 기나긴 투쟁 끝에 1987년 민주화를 이뤘다.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계속 발전했고, 이 과정을 지켜본 내 눈에는 민주화 이후 약 20여 년 뒤에 등장한 이화동 벽화마을은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드러내는 상징처럼 여겨졌다. 내가 어릴 때 봤던 학교 벽화와는 사뭇 다르긴 했지만, 표현의 행위가 자유롭다는 점에서는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걸으며 서울을 생각하다] 왜 벽화가 호응받지 못할까 과거 이화동 꽃계단의 모습. 사진제공=로버트 파우저

하지만 이런 생각은 2008년 다시 한국에 살기 시작하며 달라졌다. 오래된 동네의 재개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는 그 무렵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서울의 곳곳을 자주 걸었다. 가는 곳마다 벽화를 만나곤 했다. 도시에 대한 관심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오래된 골목마다 심심찮게 벽화가 등장했다. 그림들은 대체로 색깔도 주제도 비슷했다. 독창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자 변색과 훼손으로 어느덧 벽화는 흉물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2010년 중반 무렵 이화동 벽화마을은 문제에 직면했다. TV에 소개되고 영화 촬영지로 인기를 끌면서 찾아오는 이들이 급증했다. 말 그대로 과잉 관광, 즉 오버투어리즘 상태에 이르면서 주민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렀다. 갈등 끝에 유명세를 치르던 ‘꽃 계단’과 ‘물고기 계단’은 급기야 회색 페인트로 뒤덮이고 말았다. 그 후 관광객은 급감했다.


유명세를 치르기 전부터 인기 절정의 순간을 거쳐 허무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이화동 벽화마을의 역사를 지켜보게 된 나로서는 이런 현상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어릴 때 보던 중학교 복도 벽화는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드러내긴 했으나 그 자체로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화동의 벽화는 한때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며 주류의 정점을 차지했지만, 외지인들의 과도한 침투로 회색 페인트 아래로 가려지고 말았다.

[걸으며 서울을 생각하다] 왜 벽화가 호응받지 못할까 벽화가 사가진 서울 종로구 이화마을 계단.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그렇다면 도시에서 벽화의 성격과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며, 도시 경관의 의미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세계 여러 도시 사례가 참고된다. 어떤 도시에서 벽화의 시작은 역시 반골 기질에서 비롯했지만, 도시의 상징으로 주목을 받기도 한다. 과감하게 그려진 벽화는 미국 여러 도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필라델피아 벽화도 유명하다.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을 비롯해, 다양한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흑인 또는 히스패닉계 주민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정부 예산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 모금을 통해 예산을 확보한 뒤 주민들, 지역 상인들, 공적 기관 간의 협력과 협의를 거쳐 장소가 정해졌다. 벽화의 내용은 소수민족의 지도자나 다수 이민자의 출신국 문화 관련 주제가 채택되기도 했다. 지역의 미시사와 관련된 것도 빠지지 않았다. 이런 주제를 통해 비주류계층의 역사와 정체성을 향한 자부심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후 미국 사회는 더욱더 다양해졌으나, 이런 정신을 지향하는 벽화는 여전히 업데이트되고 있다.


1980년 뉴욕 거리 미술가로 유명한 키스 해링의 작품 거래를 시작으로 주류 미술계가 거리 미술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세계 곳곳의 거리 미술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여기에 벽화가 빠질 리 없었다. 지역 정부와 주류 미술계의 협력을 통해 전문 작가가 지정된 공간에 벽화를 그리는 방식이었다.


영국 최초의 공공미술관인 덜위치 미술관(Dulwich Picture Gallery) 큐레이터는 2011년 거리 미술가 한 사람에게 6개의 벽화를 의뢰했다. 벽화는 주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고, 여기에 힘입어 몇몇 다른 작가들에게도 의뢰, 넓은 주택가를 채운 약 40여 점의 벽화로 오늘날 ‘덜위치 아웃도어 미술관’이 만들어졌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독일 미술협회는 21개국 작가들에게 100여 점의 그림을 의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탄생시켰다.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들이 훼손되자 2009년 한 비영리재단에서 복원 사업을 진행했다.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동독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의 키스 장면을 그린 ‘형제의 키스’도 이 사업으로 복원되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미술계 안에서 독일 통일 자축 의미로 시작한 프로젝트였으나 오늘날에는 문화유산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을 만큼 대내외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화동 벽화마을은 출발은 엇비슷해 보이지만 결과는 사뭇 다르다. 원인 역시 짐작할 수 있다. 시작할 때를 돌이켜보면 대외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긴 했지만, 벽화마을의 명분이 그리 뚜렷해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흔적 역시 도드라지지 않는다. 명분도, 주민 공감대도 없이 볼거리로만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결과도 감당하지 못한 채 쓴맛만 남기게 된 셈이다. 그렇게 보면 오래된 골목길에 아름답고 기발한 그림을 통해 볼거리를 만들겠다는 시도에 앞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업이 그 지역에 있어야 할 이유와 그곳에 사는 이들의 공감대를 더욱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절실하다. 그래야만 사는 사람에게도, 찾아오는 이들에게도 의미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긴 이런 고려가 어디 벽화마을에만 필요할까.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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